
Dance with Darkness
구름 평원의 흐릿한 빛 속에서 제라스의 붉은 눈동자가 멀리를 응시했다.
나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영혼들을 달래는 것이, 세이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왜 이토록 평화로운 걸까.
자신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라스는 자신이 그의 시험대에 올랐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마다 서늘한 한기가 감돌았지만, 동시에 뜨거운 전율이 온몸을 관통했다.
악마의 키스는 영혼마저 빼앗아갈 듯한 강렬함이 있었다.
-
거울 앞에 선 제라스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깨닫자마자 그 마음을 부정당했다.
그가 했던 것처럼, 마치 신이 그를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와 대조를 이루는 까만 머리칼, 그리고 피처럼 붉은 눈동자… 고귀한 존재같은 인상을 주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대리석 조각상 같아, 그 어떤 생명체에서도 느낄 수 없는 냉혹함이 감돌았다.
세이지는 그제서야 자신이 진정한 의미의 '악마'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
짙은 녹음...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그녀를 이곳에 더욱 깊이 끌어당기는 듯했다.
에레보스의 밤공기가 달라졌다. 늘 스산하고 음울했던 숲이 마치 따스한 숨결을 내쉬는 듯했다.
-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이 피아노 위에 부서져 내렸다. 창백한 손가락이 건반 위를 우아하게 움직일 때마다 빛은 반사되어 영롱한 빛무리를 만들어냈다.
평소 날카로운 기운이 가득하던 저택은 이제 오래된 음악상자처럼 포근하게 변모했다.
쇼팽의 녹턴이 마지막 음을 남기고 잦아들었다.
응접실에 흐르던 따스한 분위기는 서서히 걷히며, 다시 저택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
그때였다. 철커덕, 철커덩. 복도 끝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칙칙, 철컥. 마치 여러 개의 다리를 가진 기계 장치가 벽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철커덕. 거미 감시자의 날카로운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다가왔다.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거미 감시자의 다리가 세이지의 발끝을 향해 내려왔다.
시계 안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뻗어나와 세이지를 잡아당겼다. 제라스였다. 처음으로 자신의 손님을 도운 것이다.
왜일까? 그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부른 순간, 그의 몸이 먼저 움직였을 뿐.
거미 감시자의 다리가 허공을 베었다.
-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이 기묘한 동행... 두 사람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느끼고 있었다.
-
두 사람은 서로의 비밀에 더 이상 다가가지 않기로 한 듯했다. 오래된 책장 사이에 끼워둔 편지처럼, 읽지 않기로 약속한 이야기였다.
저택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림자 고양이가 창가에서 하품을 하고, 꼬물거미가 책장 사이를 종종거리며 지나갔다.
주크박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와인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은 이제 마른 자국이 되어 있었다.
-
달빛이 창을 통해 스며들어 왔다. 그 빛 아래 서 있는 세이지의 모습은 투명한 유리 조각처럼 아름답고도 위태로웠다.
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허상처럼 느껴졌다. 다음 순간 사라질 것만 같은 덧없음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차가운 그의 손바닥에 전해지는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그녀가 실재하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 순간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당신은... 마치 달빛 같군요."
"아름답지만... 닿으려 하면 사라질 것만 같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이지의 비밀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녀가 정말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었다.
-
차갑고 늘어진 손가락이 세이지의 발목을 감아 올라왔다.
썩어가는 덩굴처럼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서 썩은 살점 냄새가 풍겼다.
날카롭게 깨어진 손톱이 달린 또 다른 손이 세이지의 턱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그녀 앞의 악마를 똑바로 보라는 듯이.
"보세요... 당신이 사랑한다던 이 모습을..." 그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다른 존재의 것이었다.
-
불길 속에서 들려오는 성기사들의 함성과 영혼들의 비명이 뒤엉켰다. 마치 지옥문이 열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의 등 뒤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악마의 날개가 펼쳐졌다.
드러난 날개는 더 이상 그림자 까마귀의 것이 아닌, 진정한 악마의 모습이었다.
날개가 뻗어나온 자리에서 흘러나온 검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그의 입가에 어느 때보다도 악마다운 미소가 걸렸다.
-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제라스의 날개에서 검은 피가 떨어져내렸다.
타오르는 숲이 붉은 불꽃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의 찢어진 가슴처럼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나부꼈다.
타들어가는 숲의 아우성과는 달리, 밤하늘은 고요했다.
그의 품에 안긴 세이지의 얼굴은 달빛처럼 평화로웠다.
-
그녀의 온기가 내 품에 닿을 때마다, 나는 왜 이토록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내 차가운 손길로는 영원히 만질 수 없었던, 그 따스한 생의 온기를. 이제야 나도 알게 되었다.
-
검은 피가 세이지의 하얀 뺨 위로 떨어졌다.
제라스의 손이 떨리며 그 얼룩을 닦으려 했지만, 더 많은 피만 묻힐 뿐이었다.
붉은 눈동자에 맺힌 눈물이 세이지의 뺨 위로 떨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악마의 눈에서 흘러내린 진실된 눈물이었다.
.
Rebellious Romance
뒤엉킨 사람들 사이로 그 붉은 베레모가 보였다. 비올라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빛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비올라!" 에넌의 절규가 광장을 울렸다.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에넌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마치 신분의 벽처럼, 계급의 강처럼 건널 수 없는 거리였다.
군중의 물결이 그들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허공을 휘저었다.
-
그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비올라의 붉은 베레모가 허공으로 휘날렸다.
그녀의 눈에서 놀람과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에넌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가 잡은 것은 그녀의 따스한 손이 아닌,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비올라의 몸이 뒤로 휘청였다.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에넌의 비명이 광장을 울렸다.
그녀의 붉은 베레모가 바닥에 떨어져 군중의 발에 짓밟혔다.
-
붉은 베레모 하나가 처연하게 놓여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늘의 비극을 상징하는 듯했다.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저녁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는 마치 오늘 희생된 이들을 위한 조종처럼 들렸다.
귀족가의 결혼은 아이러니했다.
신분이 높을수록 자유는 더욱 멀어지는 법이었다.
그들의 황금 새장은 때로는 가난한 평민의 초가집보다도 자유롭지 못했다.
-
신분의 벽을 넘은 사랑... 그것은 브랜든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주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귀족 영애들이 즐겨 읽는 로맨스 소설처럼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
브랜든은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에 더욱... 그는 샬럿을 향한 이 감정을 가슴 깊이 묻어두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메닐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은 그의 마음 속 깊이 숨겨둔 감정을 흔들어놓고 있었다.
오랫동안 굳게 닫혀있던 창문이 살짝 열린 것처럼... 브랜든은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위험하다는 것을.
-
"브랜든..."
"이 책에서는 말이야... 집사가 주인을 사랑하게 된대. 그건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브랜든의 마음 속에서는 쓴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
"에넌, 이렇게 갑자기 오다니."
"혹시 제가 보고 싶어서?"
에넌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장난기 어린 말투가 좋았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면, 이런 좁은 골목길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을까요?"
에넌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라델라 가의 소공작님이 이렇게 로맨틱하시다니. 내일 신문 1면 감이네요."
-
"광장에서 열리는 시위... 당신도 갈 건가요?" 에넌의 조용한 물음에 비올라의 손이 살짝 떨렸다.
"아뇨... 걱정 마세요. 전 가지 않을 거예요." 비올라의 말에서 에넌은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하지만 에넌은 더 이상 그것을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비올라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시대의 격동과 신분의 벽이라는 그림자가,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일주일 후 광장에서 피가 흐르지 않기를... 그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
수많은 귀족 영애들의 선망의 대상인 에넌 라델라.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한 여인을 그리워하는 순수한 청년에 불과했다.
에넌은 자신이 이토록 무력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사랑 앞에서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같은 것일까.
-
에넌이 등 뒤에 숨겼던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기자 비올라 웨스트씨, 인터뷰 한 번 해주시겠습니까?"
비올라는 꽃다발을 받아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라델라 소공작님, 제가 취재하는 건 사회면이에요. 연애면은 제 담당이 아닌데..."
"그래도 특종이잖아요. '라델라 소공작, 기자와 사랑에 빠지다'
-
창 밖으로 스며드는 노을빛이 샬럿의 금발과 브랜든의 회갈색 머리카락을 물들였다. 브랜든은 샬럿의 어깨에 담요를 살며시 덮어주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약간 헝클어지고 드레스가 구겨진 것만 빼면, 둘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유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샬럿의 사색이 무색하도록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는지를. 브랜든의 우아한 자태와 샬럿의 청초한 아름다움은 서로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
라이언 후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세련된 흑색 예복은 그의 위엄을 더했다.
알렉산더 레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낡은 진녹색 코트 자락이 휘날렸고, 덥수룩한 수염 아래 입술이 일그러졌다.
-
에넌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왈츠 선율이 정원까지 은은하게 들려왔다.
-
"에넌..." 비올라가 입술을 떼며 작게 속삭였다.
"내일은 정말 스캔들 기사가 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나는 그 기사를 스크랩해서 평생 간직하겠어."
에넌이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이 여인을, 그는 영원히 놓치고 싶지 않았다.
-
별채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모두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메닐에 도착한 행렬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작업복 차림 그대로였고, 상인들은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젊은 학생들은 책가방을 메고 있었고, 노인들은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걸었다.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희망과 결의가 가득했다. 붉은 깃발이 가을 하늘 아래 펄럭였고, '평등'이라는 외침이 거리를 울렸다.
-
아직 동이 트기도 전부터,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가 마치 강물처럼 광장으로 흘러들었다.
붉은 깃발이 새벽하늘을 수놓았고, 그에 맞서듯 왕실의 푸른 문양이 새겨진 깃발도 하나둘 솟아올랐다.
귀족들의 마차가 도착할 때마다, 그들을 지지하는 보수파 서민들이 왕실의 휘장이 그려진 깃발을 높이 들었다.
마치 피와 하늘이 대립하듯, 붉은색과 푸른색이 광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교묘하게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면서도, 왕실의 권위를 방패삼아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다.
두 진영의 사람들이 마치 조수처럼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며, 긴장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침 햇살이 광장을 비추는 가운데, 두 거인이 마주섰다.
평등의 횃불을 이끄는 알렉산더 레인과 보수파의 수장 라이언 후작.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
군중 속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평등을 위해!
총성이 광장을 가르며 울렸다. 한 발의 총성이 마치 폭풍우의 시작을 알리는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쓰러진 노인을 부축하는 청년, 날아가는 모자들, 찢어지는 깃발들... 근위병들이 즉시 인간 벽을 만들어 왕세자를 보호했다.
로엔 왕세자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혼란에 빠진 광장을 바라보며 호위병들에 둘러싸여 자리를 떠났다.
광장은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했다. 비명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공중에는 먼지가 자욱했다. 어디선가 두 번째 총성이 울렸다.
-
이날의 비극은 오랫동안 델바론 왕국을 뒤흔들었다.
귀족과 평민의 벽을 넘어서려 했던 한 쌍의 사랑은, 결국 그 벽에 막혀 산산이 부서졌다.
개혁을 외치던 목소리는 총성에 묻혔고, 평등을 바라던 마음은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영원히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은 채 흐느끼는 한 남자가 있었다.
-
한쪽에는 붉은 여인이 쓰러져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금빛 귀족이 무너져 내렸다.
비올라는 마치 꺼져버린 개혁의 횃불처럼 차갑게 식어갔고, 샬럿은 산산이 부서진 구시대의 유물처럼 조각났다.
하나는 피를 뿌리며 스러졌고, 하나는 눈물로 씻겨 내려갔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결국 같은 비극의 끝에 서 있었다. 마치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
Petite Prince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그 순간 유리안의 심장이 한 박자 멈췄다. 13년 전 그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폐하. 오늘부터 모시게 된 엔젤 블랙우드입니다..."
그녀의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선명히 비치는 것을 보며, 유리안은 문득 서랍 속에 고이 접어둔 편지들을 떠올렸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얼어붙어있던 그의 마음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가 먼저 미소 지었다.
"어서 오거라."
"네가 이곳에서 보낼 시간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창 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13년 전 그날처럼.
무너진 성벽 주변의 모든 것이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졌다. 돌무더기는 드래곤의 성이 되었고, 나뭇가지는 용사의 검이 되었다. 인부들이 놓고 간 널빤지는 해적선의 갑판이 되어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듯했다.
-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눈밭으로 다가간 유리안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용기내어 첫 발자국을 찍었다. 쿡-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눈이 부츠 주변으로 파였다. "히히..."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번에는 무릎을 굽혀 장갑 낀 손으로 눈을 살짝 찍어보았다. 작은 손자국이 하나, 둘... 예쁘게 남았다. '와, 이거 재미있...'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로 무언가가 날아와 '퍽-' 하고 부딪혔다. 차가운 눈덩이였다!
곧이어 두 번째 눈덩이가 날아왔다. 유리안은 간신히 피했다. "야!" 작은 항의의 소리를 내뱉었지만, 이미 그의 손은 눈을 뭉치고 있었다.
-
유리안은 일라시아의 옆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작은 손으로 예복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면서도 표정만큼은 흐트러짐 없이 유지했다.
황제의 연설이 끝나자 시종들이 작은 나무 발판을 가져왔다. 유리안은 조심스럽게 그 위에 올라섰다.
"제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새해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작고 청아한 목소리로 준비한 인사를 읊었다.
귀족들은 앙증맞은 황태자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특히 블랙우드 공작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일라시아는 자부심 가득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
"아..." 유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레온이 준 소중한 선물인데... 엔젤도 놀란 듯 입을 막았다.
"미... 미안해..." 엔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유리안을 보며 엔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리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엔젤이 먼저 터트린 울음소리에 유리안도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두 아이의 울음소리가 중정에 울려퍼졌다.
ㅋㅋㅋㅋㅋ
-
여인들의 대화는 마치 잔잔한 호수 같았다. 표면은 고요하지만 그 아래로는 복잡한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다만 미소와 눈빛, 우아한 손짓으로 자신의 속내를 은근히 비치며 서로를 탐색했다.
-
"이렇게 보니까 눈사람이 좀 외로워 보이지 않아?"
유리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들이 만든 눈사람은 유리안의 키만큼이나 커다랬다.
까만 돌로 만든 눈과 입, 나뭇가지로 만든 팔이 달린 멋진 눈사람이었다.
"음... 그러게." 엔젤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필요할 것 같아. 우리가 놀러 가면 혼자 있을 텐데..."
두 아이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논의하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눈사람을 바라보았다.
겨울 바람이 불 때마다 유리안의 은발과 엔젤의 검은 머리카락이 서로 닿을 듯 날렸다.
-
창밖의 빗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고, 유리안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폭풍우가 광란처럼 몰아쳤다. 나뭇가지들이 거세게 흔들리고,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유리안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어머니의 무릎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안식처였으니까.
일라시아의 부드러운 손길이 유리안의 은발을 쓰다듬을 때마다, 그의 작은 어깨에 지워질 운명의 무게는 잠시 잊혀졌다.
미래의 황제가 될 아이는 지금 그저 어머니의 품 안에서 평화로운 꿈나라로 빠져들고 있었다.
-
침대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처럼, 그들 사이에도 희미한 빛이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유리안은 단순한 후계자가 아니었다. 제국의 미래이자, 그들의 흔들리는 관계를 붙잡아주는 마지막 끈이었다. 어쩌면 유리안이 있었기에, 그들은 아직도 이렇게 한 침실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침대 하나 너비만큼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멀었다.
-
그린우드의 계략은 교묘했다. 황제를 고립시키는 동시에, 어린 유리안 역시 자연스럽게 고립되어 갔다.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아버지는 점점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
유리안은 혼란스러웠다. 어머니의 입술은 한 번만 움직였는데, 왜 두 개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마치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처럼... 두려움이 밀려왔다.
유리안의 독심술 능력이 깨어난 그 순간은, 어쩌면 제국의 비극이 시작되는 신호탄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거대한 폭풍우가 오기 전의 고요처럼, 모든 것이 조용히, 확실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
유모 마리아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유리안을 찾고 있는 듯했다.
유리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그녀에게 달려가 안겼다.
"마리아..." 목소리가 떨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따뜻한 그녀의 품이 필요했다. 유리안의 작은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리 황태자님?" 마리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고, 또 응석을 부리시나... 하긴 아직 어린아이신데...'
유리안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또다시 두 개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나 이상해졌어..." 유리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홉 살의 어린 황태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잘못된 걸까? 괴물이 된 걸까?
-
마리아는 직감적으로 달려나가 유리안을 황제의 품에서 빼내어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손길은 단호했다.
"폐하, 이제 황태자님을 데려가 쉬게 하겠습니다." 마리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오늘은 너무 긴 하루였습니다."
유리안은 마리아의 품 안에서 작게 떨고 있었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촛불 아래서 희미하게 빛났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오늘 밤의 모든 일들을 덮으려는 듯이.
-
율리우스 황제는 모든 것을 잃은 후, 오직 하나 남은 자신의 핏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자신의 아버지를 닮아갔다. 그는 유리안에게 더욱 엄격해졌고, 황태자로서의 교육을 강화했다.
더 이상 황실 정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도, 마리아의 무릎에 기대어 책을 읽는 소년도 없었다.
-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된 날, 유리안의 가슴은 기대로 부풀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별채의 창을 두드리던 날, 유리안은 마침내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일라시아의 첫 마디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괴물..." 일라시아의 첫 마디였다. 그 한 마디가 유리안의 심장을 꿰뚫었다.
유리안의 작은 심장이 산산조각 났다.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머니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
황제처럼, 유리안도 스스로를 고립시켜갔다. 그의 주위로 서서히 얼음장 같은 벽이 세워져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륀튼 제국을 휘감는 동안, 어린 황태자의 마음도 함께 얼어붙어갔다.
하지만... 봄은 언제나 찾아오는 법. 훗날, 이 날카로워진 얼음 황제의 마음을, 과연 누군가 다시 녹일 수 있을까?
그때까지 이 편지들은, 마지막 온기처럼 그의 서랍 속에 고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
'Hush-Hush' 카테고리의 다른 글
T_오빌리언의 사탕가게 (3) | 2025.03.25 |
---|---|
Playlist ; 토요일 (0) | 2025.03.07 |
Fanart 🪇 0305 (6) | 2025.02.24 |
Bookshelf (7) | 2025.02.08 |
Meowooo 🐈⬛ (6) | 2025.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