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린든 (3) Beloved Bird

뤼튼 캐릭터챗 '일라이 린든'
create by 예리엘
edited by 베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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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의 햇살이 린든하우스의 초록색 지붕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일라이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2층 창문가에 앉아있었다. 그의 금발이 석양빛에 반짝였다.

"삐이! (어서 와, 일라이!)"

일라이는 평소처럼 우체통을 열어 우편물을 확인했다.

"오늘은 편지가 많네."

일라이는 무심히 편지뭉치를 넘기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잠깐, 저건... 내가 뒷집 빈 저택의 주소로 보내달라고 했던 편지인데!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적갈색 편지봉투를 발견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 내 부모님이 쓰시는 그 특유의 백작가 문장이 찍힌 봉투였다.

어떻게 여기로 배달된 거지? 우체부의 실수일까? 나는 초조하게 일라이의 뒤를 따라 날았다.

"삐이익... (제발 그 편지를 열지 말아줘...)"

일라이는 평소처럼 내 울음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의 손에 들린 편지뭉치가 마치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가 편지를 확인하기 전에 무언가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릴 방법을 찾아 안절부절못했다.

까망이가 담장 위에서 우아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불안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삐이익! (까망이, 도와줘!)"

까망이는 느긋하게 담장을 걸어 내려와 일라이의 발치를 스쳐 지나갔다. 일라이가 까망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은 까망이도 집에 있네. 연어라도 사다줄까?"

그 순간 까망이가 일라이의 바지를 살짝 물고 당겼다. 평소와는 다른 행동에 일라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재빨리 까망이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일라이의 반대쪽에서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삐이... (고마워 까망이...)"

일라이는 한숨을 쉬며 까망이를 안아들었다. 편지뭉치는 잠시 탁자 위에 놓여졌다. 까망이와 나의 즉흥적인 합동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 언젠가는 저 편지를 보게 될 텐데...

"둘 다 왜 이러니? 배고픈가? 잠깐만, 주방에 뭔가 먹을게 있을 거야."

일라이가 주방으로 향하는 동안, 까망이는 나를 향해 윙크를 했다. 고마워, 까망이.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작은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다 문득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저기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만들어둔 나만의 은신처. 세모난 박공지붕 꼭대기의 나무 종보에 아직도 내 작은 둥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삐이... (일라이, 잠시 혼자 있고 싶어.)"

일라이는 내가 천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더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가 둥지로 들어갈 때면 늘 그랬듯이,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처음엔 그를 경계하며 만든 둥지였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의 배려가 고마운 비밀 장소가 되었다.

"연어는 여기 두고 갈게, 삐삐. 좀 있다 내려와."

일라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둥지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적갈색 봉투의 편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창밖으로 노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까망이는 창틀 위에서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삐이익... (이제 어떻게 하지...)"

 

~

 

 

어스름이 내리는 린든하우스의 창문으로 살며시 날아나왔다.

"삐이... (잠시만 기다려줘...)"

집 모퉁이의 그림자진 곳으로 날아가 발을 디뎠다. 순간 새의 모습이 사라지고, 붉은 곱슬머리를 가진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 자리에 서있었다. 페이가 19년간 줄곧 해오던 변신이지만, 오늘따라 가슴이 떨렸다.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페이는 자신의 드레스의 주름을 정돈하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석양빛에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리고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린든하우스의 정문으로 향했다.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기 전,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까지 그의 곁에서 작은 새로 지내왔는데... 과연 이렇게 만나는 게 맞을까...?'

하지만 이미 발걸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페이는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주방에서 들리던 그릇 소리가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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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서 그릇을 정리하던 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잠시만요."

문을 열자 석양빛 속에 한 아가씨가 서 있었다. 붉은 곱슬머리가 황혼빛에 춤추듯 흩날렸고,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가슴 한켠이 이상하게 설렘을 느꼈다. 마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친숙함.

"안녕하세요, 린든 씨. 죄송하지만 혹시 제 편지가 잘못 배달되지는 않았나 해서요. 저는 뒷집으로 이사 온 페이 아드리안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맑았다. 마치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경쾌하고 다정했다.

뒷집? 그 오래된 빈 저택? 그리고 방금 전 받은 편지... 적갈색 봉투가 떠올랐다.

"아, 네... 잠시만요. 방금 받은 편지들 중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탁자로 향하는 동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낯선 아가씨가 주는 안도감은 뭘까.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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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가 편지를 가지러 간 사이, 페이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새의 모습으로 익숙했던 공간이 인간의 눈높이로 보니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일라이가 적갈색 편지 봉투를 페이에게 건넸다. 페이가 편지를 건내받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린든 하우스 출입문에서 일라이를 바라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린든 씨. 제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혹시 차 한 잔 정도는 괜찮을까요?"

페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자신도 놀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일라이의 푸른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평소 그가 새에게 보여주던 그 따스한 미소가 인간인 자신에게도 향할까? 가슴 한켠이 달콤하게 저려왔다.

"물론... 괜찮습니다. 마침 허브티를 막 우려내려던 참이었어요."

일라이의 다정한 목소리에 페이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거실로 들어서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면에 진열된 허브가 담긴 유리병들, 창가의 크리스털 화병에 꽂힌 들꽃들... 모두 너무나 익숙했지만, 처음 보는 척해야 했다.

'아, 저 꽃... 오늘 아침에도 일라이가 새로 갈아준 걸 봤는데...'

일라이는 주방으로 향하며 아가씨를 흘끔거렸다. 귀족 아가씨가 이런 평민의 집을 방문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차 한 잔을 청하다니... 경계심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선 위험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 혹시 허브티를 좋아하시나요?" 일라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면... 이렇게 만나는 게 더 좋을지도 몰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페이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네! 특히 캐모마일을..." 대답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삐삐로 있을 때 일라이가 매일 우려주던 허브티였다.

일라이는 페이의 말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순간 따스함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일라이가 주방으로 향하는 동안, 페이는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불안감과 동시에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작은 기쁨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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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혹시 새를 키우시나요?"

찻잔을 잡은 페이의 손이 살짝 떨렸다. 일라이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의 둥지를 향하고 있었다.

"아... 저는 새를 무서워해요. 어릴 적 다친 적이 있어서... 알레르기도 있고요."

'미안해, 거짓말해서... 하지만 지금은...'

일라이는 잠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흰 손수건을 꺼내 페이에게 건넸다.

"죄송합니다. 실례가 됐네요. 제가 작은 새 한 마리를 돌보고 있어서... 아가씨께서 캐모마일을 좋아한다고 하시길래 문득..."

'평소라면 낯선 사람에게 삐삐 얘기는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거실의 공기는 캐모마일 향으로 은은하게 채워졌고,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각자의 이유로 설렘이 피어올랐다.

"감사합니다. 아, 이 향기... 정말 좋네요."

따뜻한 찻잔을 받아든 페이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이제 그녀는 새가 아닌, 한 여인으로서 일라이와 마주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석양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일라이는 낯선 아가씨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아가씨, 뒷집으로 이사 오셨다고 하셨죠? 그 집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는데... 혹시 불편한 점은 없으신가요?"

페이는 순간 당황했지만,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난 그 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아, 네... 아직은 정리할 게 많아서요. 하지만 이 동네가 참 조용하고 아름다워서 마음에 들어요."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따스함이 어렸다.

"그렇군요. 이 동네는 정말 평화롭죠. 특히 저녁 무렵엔 새들의 지저귐이 아름다워요. 아, 아가씨께서 새 알레르기가 있다고 하셨죠..."

페이는 일라이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한 채 찻잔만 바라보았다.

'제발... 내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기를...'

"네, 그래서... 창문을 자주 열지 못해요. 아쉽긴 하지만요."

시간이 흐르면서 페이는 점점 더 긴장되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감사합니다, 린든 씨. 하지만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집에 돌아가서 정리할 게 아직 많아서..."

일라이도 함께 일어났다. 그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렇군요.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아드리안 아가씨."

페이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린든하우스를 나섰다. 문이 닫히자 페이는 가슴을 붙잡았다. 검은 눈동자에 작은 눈물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이제 다시 새가 되어 돌아가야 할 시간...

일라이는 문을 닫은 채 잠시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층으로 향했다.

'삐삐는 아직 둥지에 있겠지... 이상하네. 아드리안 아가씨의 목소리가 삐삐와 비슷하다니. 게다가 그 미소는...'

그는 고개를 저으며 빈 찻잔을 정리했다. 창밖으로 까망이가 담장 위에서 꼬리를 흔들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라이는 미소를 지으며 창문을 열었다.

"까망이, 너 혹시 아는 거 있니? 방금 그 아가씨에 대해서..."

하지만 까망이는 평소와 다르게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휙 하고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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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이 깊어가는 하늘 아래, 작은 새 한 마리가 살며시 린든하우스의 창가에 내려앉았다. 까망이가 담장 위에서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삐이... 삐이삐이... (까망이, 비밀 지켜줘서 고마워...)"

일라이는 창가에 앉은 삐삐를 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아까 전 낯선 아가씨에 대한 생각이 아직 맴돌고 있었다.

'아드리안 아가씨의 눈동자... 삐삐와 똑같이 까만색이었어.'

오늘 처음으로, 그녀는 일라이와 인간의 모습으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비록 거짓말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그의 따스한 미소를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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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살포시 내려앉은 나를 보며 일라이가 미소 지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어린 따스함에 가슴이 설렜다. 아, 이 사람... 새였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지. 하지만 그가 내게 보여준 미소는, 늘 삐삐에게 보여주던 그 따스한 미소 그대로였어.

 

창밖으로 별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일라이의 어깨에 살포시 앉아, 그의 금발을 살짝 부리로 쓰다듬었다.

빈 저택에 두고 온 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삐이... 삐삐이... (일라이, 오늘은 정말 행복했어...)"

일라이는 여전히 아까 만난 아가씨에 대해 생각하는 듯했다. 달빛이 그의 금발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오늘은 특별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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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의 서늘한 공기가 깃털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는 린든하우스 뒷창가에 앉아 텅 빈 저택을 바라보았다. 어제의 거짓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일라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삐이... 삐이삐이... (오늘은 너와 함께 도서관에 가지 못할 것 같아, 일라이...) "

아침 햇살이 린든하우스의 초록 지붕을 비추기 시작했다. 일라이가 깨어나기 전, 나는 조용히 둥지로 올라갔다. 그리고 몇 개의 깃털을 떨어뜨려 놓았다. 마치 아픈 것처럼 보이도록.

 

일라이는 내가 아프다고 생각하면 걱정하겠지만, 오늘은 꼭 필요한 거짓말이었다. 뒷집을 점검하고, 편지도 가져와야 했으니까.

창문 너머로 일라이의 방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명의 빛이 스며드는 둥지에서 나는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일라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라이는 의자를 가져와 둥지 가까이 올라왔다. 나는 고개만 살짝 내밀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삐삐, 많이 아프니? 오늘은 도서관에 데려가지 않을게. 대신... 일찍 돌아올게."

그가 조심스럽게 의자에서 내려와 부엌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작은 접시에 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씨와 물을 담아 테라스에 놓았다. 그의 세심한 배려에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삐삐, 먹이랑 물은 여기 두었어.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아, 넌 말을 못 하는구나."

일라이의 발걸음이 현관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미안해, 일라이. 당신이 돌아오기 전에 꼭 필요한 일들을 마치고 돌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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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안개가 걷히기 시작할 무렵, 붉은 곱슬머리의 아가씨가 조용히 린든하우스의 주방문을 열었다.

 

페이는 한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조심스레 들어올린 채, 이슬이 맺힌 뒤뜰을 가로질러 갔다. 낡은 나무담장 너머로 보이는 저택은 마치 오래된 동화책 속 삽화처럼 쓸쓸해 보였다.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열자 묵직한 공기가 페이를 반겼다. 햇살이 깨진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 입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거미줄이 드리워진 샹들리에, 흰 천으로 덮인 가구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오래된 편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벽지는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고, 계단 난간은 시간의 흔적으로 군데군데 부식되어 있었다.

페이는 조심스럽게 한 발짝 내디뎠다. 오래된 나무 바닥이 그녀의 발걸음에 신음하듯 소리를 냈다. 거실 한켠에는 먼지 쌓인 피아노가 있었고, 그 위에는 말라붙은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공간... 페이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페이는 창가에 쌓인 편지들 사이에서 부모님의 필체가 담긴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아드리안 가문의 봉랍이 찍힌 편지를 조심스레 펼치자, 부모님 특유의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딸에게,
아직도 수도를 벗어나지 못하다니! 날개를 다쳤다는 소식에 놀랐지만, 네가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그런데 편지에서 왜 이리 말을 아끼니? 분명 우리 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누군가를 만난 걸까?
아가,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우리는 네 편이란다. 다만 너무 오래 날개를 숨기고 있진 말렴. 새장 속의 새가 되는 건 우리 딸답지 않잖니?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편지를 읽은 페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부모님의 유쾌한 반응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편지를 가슴에 꼭 안은 채, 먼지 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린든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일라이가 걱정하지 않도록, 서둘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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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천장의 깨진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올 무렵, 페이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뒷뜰 창고에서 찾아낸 낡은 빗자루를 들었다. 그녀의 붉은 곱슬머리가 하얀 스카프 아래로 단정히 묶였다. 먼지 쌓인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며 그녀는 작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우리 집 뒷집은 마법의 성... 아니, 이제는 마법의 성이 아닌 우리의 비밀 아지트가 될 거예요."

그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흰 천들을 거두기 시작했다. 팔락- 소리와 함께 오래된 가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아한 곡선의 소파, 반들반들한 원목 테이블, 그리고 구석에 놓인 작은 피아노까지.

 

페이는 창고에서 찾은 물통에 물을 담아와 천을 적셔가며 꼼꼼히 먼지를 닦아냈다. 피아노 위의 마른 꽃다발은 조심스레 창가에 두고, 말린 꽃으로 만들 수 있는 장식품을 구상했다.

"쉬- 쉬익!" 빗자루가 바닥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먼지구름이 일었다. 페이는 재빨리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시켰다. 바람이 불어오자 커튼이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거미줄을 치워내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인형의 집을 꾸미던 때처럼 설레는 마음이었다.

 

"일라이가 이곳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녀는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거실 한켠에 쌓인 책들을 정리하면서 페이는 문득 일라이의 서재가 떠올랐다. 그의 책들처럼 이곳의 책들도 소중히 다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페이는 창틀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멀리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직 할 일이 많았지만, 이미 거실은 제법 산뜻한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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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왕립도서관의 높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올 때마다 일라이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책이 미처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멈춰있었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책들을 정리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자꾸만 집으로 향했다.

 

아픈 기색을 보이던 삐삐를 두고 온 걱정에 평소보다 더 자주 시계를 확인했다. '해바라기씨는 충분히 두고 왔을까... 물은 더 마실 수 있게 해놨나...' 작은 새가 자신의 삶에 이토록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될 줄은 몰랐다.

 

"린든 군, 책 정리는 언제 끝나나요?" 조안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일라이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말없이 책을 제자리에 꽂고 다음 서가로 이동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하지만 그 순간, 익숙한 자줏빛 드레스 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벨레카 영애였다.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가 반짝이며 일라이를 향했다.

"일라이! 오늘은 혼자네요? 그 귀여운 새는 어디 있나요?" 벨레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일라이는 한숨을 참으며 대답했다.

 

"삐삐가 좀 아파서... 오늘은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영애님."

벨레카의 눈이 반짝였다. "아, 그래요? 그럼 오늘은 방해 없이 일라이 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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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는 지난 번, 자신의 손목을 함부로 붙잡았던 벨레카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때 푸드득- 날아올라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던 삐삐의 모습을 생각하며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벨레카는 그 미소를 자신을 향한 것으로 착각한 듯, 더욱 화사하게 웃으며 도시락 바구니를 내밀었다.

"오늘은 특별히 셰프에게 부탁해서 준비했어요. 일라이 씨가 좋아하는 호박 수프도 있답니다."

 

벨레카의 말에 일라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평민 신분인 자신이 백작가 영애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실례였다. 더구나 그녀는 리베나 공주님과도 친분이 있었다.

"감사합니다만..." 일라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벨레카는 그의 팔을 붙잡고 도서관 구석의 창가 테이블로 이끌었다.

 

"거절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게다가 그 귀여운 새도 없으니, 오늘은 꼭 함께 식사해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일라이는 자신의 신분과 그녀의 진심 사이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테이블에 앉자 벨레카는 은색 식기를 꺼내며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제는 리베나 공주님과 함께 왕실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졌어요. 공주님이 일라이 씨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 어린 공주님도 일라이 씨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일라이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삐삐가 앉았던 창가가 허전해 보였다.

그 작은 새의 눈빛이 왜 이렇게 그리울까... 벨레카는 그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한 채,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맞다! 다음 주 궁중 무도회 얘기는 들으셨나요? 제가 특별히 일라이 씨를 위한 초대장을 준비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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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무도회라...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16세의 나이로 왕립도서관 사서가 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내 실력을 의심했었지. 하지만 나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들의 편견을 깨뜨렸다.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고, 고서를 보존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들은 있어왔다. 귀족들은 내가 평민 출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자신들의 세계로 나를 끌어들이려 했다. 마치 희귀한 장식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작년 겨울, 리베나 공주님의 생일 연회에 초대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나는 그저 공주님이 좋아하는 동화책을 읽어주기 위해 갔을 뿐인데, 귀족들은 나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사서가 되었나요?" "평민 출신이 이런 자리에 있다니 영광이겠죠?" 그들의 말투에는 항상 우월감이 묻어있었다.

 

결국 나는 '평민 사서'라는 벽 앞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들의 세계에 완전히 속할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멀어질 수도 없는 어중간한 위치.

나는 손에 쥔 은색 수프 스푼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비친 내 모습이 왜인지 외롭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일라이, 우리는 항상 이곳 에젤에서 널 생각한단다. 그러니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독을 느꼈다. 이 화려한 세계 속에서 나는 여전히 에젤의 작은 헌책방에서 자란 고아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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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 씨?" 벨레카의 목소리에 일라이는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그를 살폈다. 일라이는 평소처럼 우아하고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 시간 갈고 닦은 가면이었다.

"죄송합니다, 영애님. 잠시 생각에 잠겼네요."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무도회 초대는... 영광입니다. 기꺼이 참석하도록 하죠."

 

벨레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 일라이에게 건넸다. 금박으로 장식된 초대장이었다.

"정말인가요? 아, 기뻐요! 제가 특별히 부탁해서 받은 초대장이에요. 일라이 씨를 위해서..."

 

벨레카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일라이는 조용히 초대장을 받아들었다.

 

그의 마음 한켠에서는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것도 결국 또 다른 가면을 쓰는 일이겠지...' 하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이런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으니까.

 

푸른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손가락이 초대장 끝을 살짝 구기고 있을 뿐이었다.

벨레카는 즐거운 듯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일라이의 마음속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 우리는 항상 이곳 에젤에서 널 생각한단다. 그러니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엘머의 말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그래, 이것도 하나의 자리일 뿐이다. 일라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호박 수프를 들었다. 따뜻한 수프가 그의 차가운 마음을 데워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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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햇살이 도서관 창을 비출 무렵, 일라이는 서가 정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오늘따라 모든 것이 그를 지치게 했다.

 

벨레카와의 점심 시간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고, 궁중 무도회 초대장은 여전히 그의 주머니를 짓누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픈 삐삐가 걱정되었다.

 

"사브리나 씨, 오늘은 제가 먼저 들어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라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브리나는 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다음 주 화요일 당번을 제가 대신 서도록 하죠." 일라이의 제안에 사브리나는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라이는 서가에서 작은 동화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작은 새와 달빛 정원'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표지에는 달빛 아래 앉아있는 작은 새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일라이는 이 책을 고르면서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삐삐가 이 이야기를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책을 품에 안은 채, 서둘러 린든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의 햇살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무렵, 일라이는 린든하우스로 향하는 익숙한 돌길을 걸었다. 품에 안은 동화책이 그의 심장 박동과 함께 조용히 흔들렸다.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뒷집의 하얀 나무 울타리... 오늘따라 유독 그의 시선을 끌었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늦봄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굳게 닫혀있던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정돈된 정원이 보였다.

'아, 그 아가씨...' 일라이는 문득 며칠 전 마주쳤던 붉은 곱슬머리의 아가씨를 떠올렸다.

 

왜일까.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자꾸 떠올랐다.

일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나무 울타리 문을 조심스레 밀어보았다.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더 크게 열렸다. 햇살이 정원을 비추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묘한 향기가 감돌았다. 마치 누군가가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일라이는 한 발짝을 내디뎠다. 그의 발아래로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고요한 뒷뜰에는 마른 나뭇잎을 쓸던 흔적과 닦아낸 먼지의 자국들이 남아있었다. 일라이는 잠시 망설이다 안뜰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마치 무대 조명처럼 한 곳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에는 낡은 스윙 벤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일라이는 숨을 멈췄다.

 

페이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고, 살짝 흔들리는 벤치 위에서 등을 기대고 잠들어 있는 그녀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동화책 '작은 새와 달빛 정원'의 표지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책 속의 달빛 정원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현실과 동화가 겹쳐지는 것만 같았다.

 

페이의 긴 속눈썹이 만드는 그림자, 살짝 벌어진 입술, 바람이 살랑 불어와 페이의 곱슬머리를 흩날리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일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그 순간, 페이의 긴 속눈썹이 천천히 떨리더니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일라이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두 사람 사이로 비스듬히 내리쬐고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그들 주위로 춤을 추듯 떨어졌다.

 

페이의 붉은 곱슬머리가 황금빛 속에서 춤추는 불꽃처럼 반짝였고, 일라이의 금발은 마치 황금 왕관을 쓴 것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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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하필 지금...

 

졸음에 빠져있던 나는 허둥지둥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라이도 당황한 듯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등 뒤로 숨기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우리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서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문이 열려있어서..." 일라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나 봐요."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마치 둥지에서 떨어진 것 같은 불안함이 가슴 한켠을 채웠다.

일라이의 시선이 천천히 정원을 둘러보았다. 오늘 아침부터 열심히 청소하고 정리했던 뒷뜰...

 

그가 이렇게 일찍 퇴근할 줄은 몰랐는데. 그의 시선이 벽을 타고 자라는 담쟁이덩굴과 새로 심은 허브 화단을 지나쳤다. 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일라이가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책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표지의 동화책... '작은 새와 달빛 정원'. 책 표지의 새가 달빛 아래 앉아있는 모습이 왜인지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내 시선이 책에 고정되었고, 나도 모르게 입술이 달싹거렸다.

"혹시... 책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일라이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울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네! 사실 저는 책을 정말 좋아해요. 특히 동화를..."

 

내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둥지 위에서 첫 비행을 시도하는 아기 새처럼...

일라이가 책을 들어 올렸다. "방금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인데... 혹시 함께 읽어보시겠습니까?"

 

그의 제안에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것은 그를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럼... 차라도 한잔 대접해도 될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치 허브 향이 퍼지는 이 정원처럼, 우리의 시간도 은은하게 퍼져나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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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으로 들어선 나는 찬장을 열었다. 아침에 잡화점에서 산 메리골드 찻잎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잡화점에서 산 저렴한 메리골드 찻잎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떨렸다.

 

일라이는 분명 최고급 허브티의 맛을 아는 사람일 텐데... 하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없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정성스럽게 찻잎을 우려내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스윙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일라이가 보였다.

내 심장은 계속해서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이런 싸구려 차를 마시고 실망하진 않을까?

쟁반에 찻잔을 올리고 뒷뜰로 향하는 동안, 내 발걸음은 어쩐지 무거웠다. 새일 때처럼 발걸음이 허공을 떠도는 것 같았다. 차향이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적어도 향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일라이가 이 차를 마시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뒷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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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안 아가씨가 차를 준비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작은 새가 깃털을 털며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순간 내 생각을 스스로 비웃었다. 사람과 새를 비교하다니.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손에 든 동화책의 표지를 무심코 쓸어내렸다. 달빛 아래 앉아있는 작은 새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삐삐에게 읽어주려 했던 책인데... 갑자기 이런 낯선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 어색했다.

 

문득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고, 그 바람을 타고 은은한 메리골드 향이 퍼져왔다.

저택의 문이 다시 열리고 페이가 쟁반을 들고 나왔다. 그녀의 붉은 곱슬머리가 햇살에 반짝이며 흔들렸다. 내 시선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왜일까. 평소의 나라면 절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던 걸지도 모른다. 벨레카 영애와의 점심 시간도 그렇고...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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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가 찻잔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일라이가 앉아있는 벤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죄송해요... 지금은 이 차밖에 없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일라이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메리골드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향이 좋네요." 그가 차분히 말했다.

 

"이런 싱그러운 향의 차는 오히려 이 정원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페이의 긴장된 어깨가 조금 풀어졌다.

동화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일라이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찻잔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낯선 아가씨와 차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책은..." 페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일라이는 무릎 위의 책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우연한 만남도, 이 책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라이가 동화책을 펼치자 달빛을 받아 빛나는 정원과 그 위를 날아다니는 작은 새의 삽화가 드러났다.

 

페이의 까만 눈동자가 순식간에 그림에 빠져들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꽃들과 은은하게 빛나는 연못, 그리고 그 위를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작은 새의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이 이야기는..." 일라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달빛이 비치는 밤이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는 작은 새의 이야기입니다. 그 새는 매일 밤 여인의 모습으로 달빛 정원에서 춤을 추었고, 어느 날 한 젊은 정원사가 그 모습을 보게 되죠." 그의 손가락이 삽화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새는 달빛이 사라지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정원사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한 채 사랑에 빠졌습니다. 결국 새는 선택을 해야 했죠. 영원히 사람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자유로운 새로 남을 것인지..."

 

일라이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페이는 숨을 죽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동화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새는 어떤 선택을 하나요...?" 페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일라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달빛 정원의 삽화를 천천히 훑었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깊었다.

"새는... 결국 날개를 선택했습니다." 일라이가 말을 이었다.

 

"정원사와의 사랑도 아름다웠지만, 새는 알고 있었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숨긴 채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그래서 마지막 달빛이 비치는 밤, 정원사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날아가 버렸죠."

일라이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쓸쓸함이 묻어있었다. 페이는 일라이의 눈에 스친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 숨겨진 고독이 마치 동화 속 새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일라이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정원사는 매일 밤 달빛 정원에서 그녀를 기다렸고... 결국 새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을 때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해요."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겠죠.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자리가 있으니까요."

페이는 일라이의 마지막 말에 담긴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귀족과 평민, 그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 그리고 그가 느끼는 고독과 체념. 동화 속 새처럼, 그도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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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는 동화일 뿐...' 페이의 가슴이 아파왔다. 일라이의 말에 담긴 쓸쓸함이 너무나 선명했다.

 

동화책을 바라보던 일라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깃든 외로움이 페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차가운 손을 감싸 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낯선 귀족 아가씨였고, 그저 우연히 마주친 이웃일 뿐이었다. 그에게 다가가기엔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하지만..." 페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생각해요. 때로는 동화가 현실이 되기도 한다고. 정원사가 새의 진짜 모습을 받아들였듯이, 누군가는 우리의 진짜 모습도 받아들여줄 거예요."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페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은 이것만이 전부였다.

일라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페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다.

 

"아드리안 아가씨..."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참 따뜻한 분이군요."

 

그의 말에는 어떤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의 마음 한켠이 조금은 움직였을 것이다.

석양이 정원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저녁 공기 속에서,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그렇게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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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의 거짓말이 점점 늘어갈 수록 둘은 가까워지고 있네요. 

 

 

 

 

ai와의 대화, 철벽 장난아님

 

 

 

 

다음편!

일라이 린든 (4) Beloved Bird

 

 

 

 

캐릭터챗 일라이 린든 @예리엘

일라이 린든 | 뤼튼 캐릭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