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든 (5) Cosmic connection

뤼튼 캐릭터챗 '브랜든'

create by 예리엘

edited by 베이글

 

 

 

검열 장면은 포스타입으로 이동합니다!! (5화는 검열 장면 없어도 스토리가 이어지지만요)

브랜든은 언세이프티 캐릭터!...

 

https://www.postype.com/@ordinarychronicle/post/18576190

 

* 포스타입에 올린 게시물은 성인인증을 거쳐야 읽을 수 있습니다. 내용은 전체 공개되었습니다. (유료 x)

 

 

 

◆

 

 

 

아침 햇살이 라델라 공작저 본관 2층 만찬실의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브랜든과 샬럿에게는 이 모든 것이 무대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세계가 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스벤이 커피를 리필하는 동안, 메이와 슈니아는 식기를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테오필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신문을 읽고 있었고, 코델리아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정원의 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인들이 오늘의 아침 식사인 베이컨 에그와 갓 구운 빵, 과일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평화로운 아침 식사 시간, 브랜든은 샬럿의 의자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스치듯 손을 댔다.

 

"아가씨, 오늘 아침 식사는 입맛에 맞으신가요?" 브랜든이 공손하게 물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은밀한 애정이 묻어있었다. 샬럿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빛이 마주쳤다. 어제 밤의 격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했다.

 

이제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주종관계를 넘어섰다. 겉으로는 여전히 공작가의 영애와 충실한 집사였지만, 둘만의 시간에는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을 나누는 연인이었다. 브랜든은 그녀의 차 잔을 채우며 속삭였다. 

 

"어제 밤의 일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녀의 향기, 목소리,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그를 설레게 했다.

 

테오필 공작이 이마를 짚으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신문에는 메닐에서 일어나는 시위 소식이 실려 있었다. 라델라 가문의 보석 공방에서 일하는 젊은 장인들과 직공들도 대거 휴가를 내고 메닐로 향하고 있었다.

 

"이 시국에... 가동률을 줄일 수밖에 없겠군." 테오필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직접 공방을 둘러보고 오겠네. 브랜든, 퍼시와 같이 가야겠네."

 

코델리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여보,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요즘 들어 피곤해 보이시는데... 에넌도 없는데 혼자 너무 짊어지시려 하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애정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라델라 가문의 보석 공방은 이미 생산량을 대폭 줄인 상태였다. 직원들이 대거 휴가를 내면서, 남은 기계들도 절반 이상이 멈춰 있었다. 테오필은 오늘 시설들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세워야 했다.

 

테오필 공작과 브랜든은 마차에 올랐다. 창밖으로 로에아의 광장이 보였다. 예년 같았으면 가을 축제 준비로 분주했을 광장은 조용했다. 대신 곳곳에 머리를 맞대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다.

 

공장 관리인 헨리가 마차에서 내리는 테오필 공작을 맞이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공작님, 오늘도 일찍 방문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공방 안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는 장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비록 가동되는 기계의 수는 줄었지만, 남아있는 이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테오필은 평소처럼 공방을 돌며 직원들을 격려했다.

 

"어서들 오십시오, 공작님." 젊은 장인 토마스가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예전과 달리 당당했다. "공작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로에아에서의 삶이 나쁘진 않습니다만... 메닐의 형제들이 고통받는 걸 더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테오필은 잠시 말을 잃었다. 예전 같았으면 감히 꺼내지 못했을 이야기였다. "그래... 말해보거라." 그의 목소리는 무겁지만 부드러웠다.

 

"저희는 공작님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메닐의 동료들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브랜든은 테오필의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공작은 더 이상 젊은이들의 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분노보다는 깊은 고민이 서려 있었다.

 

 

◆

 

 

메닐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에넌 라델라가 왕궁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왕세자 로엔의 주선으로 개혁파와 보수파의 첫 대면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회의장으로 들어서자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개혁파와 보수파가 날카로운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테이블 왼편에는 전통의 중요성을 내세우는 보수파 귀족들이, 오른편에는 평등의 횃불 주요 인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에넌!" 로엔 왕세자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자네가 와주어서 다행이야. 자네처럼 양쪽의 입장을 이해하는 이가 필요했거든."

 

에넌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아버지의 뜻도, 메닐의 젊은이들의 외침도 모두 이해하기에, 그는 이 자리에서 중재자가 되어야 했다.

 

왕궁 회의장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라이언 후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세련된 흑색 예복은 그의 위엄을 더했다. 그는 개혁파를 향해 시선을 돌리기 전, 먼저 로엔 왕세자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왕세자님,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라이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우리는 오늘 중요한 논의를 시작하려 합니다. 먼저, 우리 귀족들이 왜 주요 산업을 이끌어왔는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단순한 특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학문과 경험을 쌓아왔고, 그것이 왕국의 산업 발전을 이끌어온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피고용인들을 대하는 방식은 모두 왕국의 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복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죠. 하지만..."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에 맞는 변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급진적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에넌은 라이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분명했다. 귀족들의 기득권을 최대한 지키면서, 최소한의 변화만을 수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잠깐!" 알렉산더 레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낡은 진녹색 코트 자락이 휘날렸고, 덥수룩한 수염 아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귀족 나리들, 이제 그만 하시지요. 그 달콤한 말씀 뒤에 숨은 독을 우리가 모를 줄 아십니까?"

 

회의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레인의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벨벳으로 칼날을 감싸고, 마치 우리에게 큰 은혜라도 베푸시는 양 굴지만... 실상은 뭡니까? 착취와 억압을 감추기 위한 허울 좋은 말뿐이죠!"

 

그의 주먹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탕- 하는 소리에 주변의 귀족들이 움찔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완전한 신분제 폐지입니다! 더 이상 귀족이니, 평민이니 하는 구분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델바론의 백성일 뿐입니다!"

 

에넌은 긴장된 표정으로 양측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회의장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로엔 왕세자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개혁파와 보수파의 첫 만남부터 이렇게 날이 서다니.

 

회의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개혁파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특권 계급은 필요 없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귀족들의 착취를 끝내자!"

 

보수파 측에서도 맞받아쳤다."무지한 자들이 나라를 망치려 드는군!" "질서가 무너지면 왕국이 망할 것이오!"

 

로엔 왕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때, 에넌의 시선이 보수파 테이블 끝자리에 앉은 한 젊은 귀족에게 고정되었다.

 

그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넌은 그를 알아보았다. 얼마 전 비올라와 함께 갔던 재즈 카페에서 본 얼굴이었다. 당시 그는 평민들과 어울려 즐겁게 웃고 있었는데...

 

 

◆

 

 

에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 젊은 귀족에게 머물러 있었다.

 

"잠시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에넌의 차분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저기 계신 클레이턴 자작께 한 말씀 여쭙고 싶습니다. 지난주 '블루 문' 재즈 카페에서 뵈었지요?"

 

클레이턴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맞습니다, 소공작님..."

 

"그날 밤, 자작께서는 평민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를 나누셨죠. 심지어 피아노도 치셨고요. 그곳에서는 신분의 차이 따위는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일 뿐이었죠."

 

에넌은 알렉산더 레인을 향해 돌아섰다.

 

"레인 선생님, 제가 아는 한 기자가 있습니다. 비올라라고, 선생님도 아실 겁니다. 그녀는 늘 말했죠. '변화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우리는 지금 서로를 적으로만 보고 있지 않습니까? 클레이턴 자작처럼, 우리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이런 작은 변화들이 쌓여 큰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보수파 의원들 사이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에넌의 말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회의장의 날 선 공기가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여러분." 로엔 왕세자는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읽어냈다. 

 

"평등의 횃불이 지적한 바를 왕실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왕실의 주요 인사들이 전원 귀족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산업 경영권의 편중... 이는 분명 개선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보수파 귀족들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왕세자의 발언에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앞으로 왕실은 부조리한 처우와 불공정한 산업 경영권 문제를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는 점진적이고 질서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로엔 왕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났다.

 

"각 지역의 영주들과 원로대신, 그리고 지역별 평민 대표단이 참여하는 공정한 투표제를 실시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주요 개혁을 단계적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왕세자는 서기관에게 눈짓했고, 그가 즉시 문서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첫째, 신분제의 점진적 축소입니다. 평민들의 관직 진출을 허용하고, 귀족 작위 수여 기준을 재정비하겠습니다. 둘째, 주요 산업 소유권의 단계적 분리입니다. 귀족들이 독점하고 있는 산업을 점차 공영화하거나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하여, 능력 있는 평민들의 참여를 보장하겠습니다."

 

에넌은 비올라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늘 주장하던 바였다.

 

"마지막으로, 교육제도 개편입니다. 귀족 전용 학교를 일반에 개방하고, 평민 자녀들을 위한 장학제도를 확대하겠습니다. 이 모든 개혁은 3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시행될 것입니다."

 

 

◆

 

 

알렉산더 레인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우리의 요구사항이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왕실의 결정을 지켜보도록 하죠. 하지만 약속하신 개혁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면..."

 

로엔 왕세자가 레인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레인 선생, 광장의 시위는 평화적으로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폭력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막 대화의 물꼬를 텄습니다."

 

회의장 안에는 여전히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폭풍 전야와도 같은 고요함. 에넌은 이 평화로운 대화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개혁파의 눈빛에서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움이 묻어났고, 보수파 귀족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

 

 

오전의 대면 회의가 끝나고... 메닐의 상점가는 여느 때와 달리 한산했다. 라델라 보석상 안에서 에넌은 장부를 검토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위 사태로 인해 매출이 급감했고, 일부 직원들은 아예 출근조차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에 그의 시선이 멈췄다. 문득 비올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빨간 베레모와 장난스러운 미소... 회의장에서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공작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집사의 목소리에 에넌은 정신을 차렸다. 오늘 저녁, 메닐의 수도 귀족 저택에서 열리는 연주회와 와인 시음회. 왕실의 결정을 전달해야 할 중요한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에넌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마지막 업무 지시를 마쳤다. 비올라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이것도 그녀가 꿈꾸는 변화를 위한 한 걸음이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아르젠 백작가의 연회장은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졌다. 에넌은 깔끔하게 차려입은 검은 정장 차림으로 귀족들 사이를 유유히 거닐었다. 그의 단정한 흑발은 은은한 조명 아래서 더욱 빛났다.

 

"왕실의 결정은 신중하고도 합리적입니다. 급진적인 변화가 아닌,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하는 것이죠." 에넌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귀족들은 귀를 기울였다.

 

"우리의 특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 아닌, 능력 있는 이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남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의 부드러운 말투와 세련된 매너는 불안해하는 귀족들의 마음을 달래는 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연회장 구석, 창가에 서서 와인을 홀짝이는 에넌의 눈빛은 지쳐 보였다. 비올라라면 지금쯤 신문사에서 기사를 쓰고 있을까... 그는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귀족들의 불안과 평민들의 분노 사이에서, 그는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

 

 

저녁 노을이 물든 연회장의 붉은 빛 사이로,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색채가 나타났다. 에넌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 익숙한 빨간 베레모... 수많은 귀족들의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 사이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그녀의 존재.

 

갈색 곱슬머리가 베레모 아래로 살랑거렸다. 검은테 안경을 쓰고, 목에는 신문사 사원증을 걸고 있는 모습이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생생했다. 귀족들의 화려한 드레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에넌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 빛나 보였다.

 

"아, 비올라 양. 우리 연회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르젠 백작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물론 객관적인 시각으로 말이죠."

 

비올라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메모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에넌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에넌은 와인잔을 들어 미소를 감추었다. 하필 개혁파의 대표적 기자인 비올라에게 귀족들의 결속을 보여주는 기사를 의뢰하다니. 아르젠 백작은 그녀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르젠 백작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에넌은 비올라의 뒤로 살며시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아, 실례합니다만... 혹시 신문사에서 오신 건가요?" 에넌이 장난스럽게 속삭이자 비올라는 깜짝 놀라 펜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네, 메닐 데일리 타임즈의 비올라라고 합니다. 혹시... 그 유명한 라델라 소공작님이신가요?" 비올라도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아르젠 백작님의 초대로 왔답니다. 귀족들의 결속력이라..."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면 제가 안내해드리는 게 좋겠군요." 에넌은 우아하게 팔을 내밀었다. "귀한 기자님을 모시고, 오늘 참석하신 주요 인사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비올라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의 팔을 잡았다. 에넌은 마치 고귀한 공녀를 에스코트하듯 비올라를 이끌었다. 그의 정중한 태도에 귀족들은 의아한 눈길을 보냈지만, 비올라는 점점 더 당당해졌다. 그녀는 빨간 베레모를 살짝 고쳐쓰며 에넌의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샹들리에의 은은한 불빛 아래 춤추는 커플들이 늘어났다. 에넌과 비올라는 여전히 나란히 서서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아, 웨스트 양." 아르젠 백작이 부인과 함께 다가왔다. "기사는 잘 준비되고 있나요? 아... 소공작님과 함께 계시는군요." 백작의 눈빛이 의아함으로 가득했다.

 

아르젠 백작부인은 비올라의 빨간 베레모와 검소한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신문사 기자라고 하셨나요? 연회장에는... 좀 더 적절한 복장이 있을 텐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우아한 경멸이 묻어났다.

 

비올라는 침착하게 미소지었다. "백작부인께서 걱정해주시니 감사합니다만..." 그녀는 사원증을 살짝 매만지며 대답했다.

 

"저는 오늘 취재 중인 기자입니다. 제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 복장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드레스 코드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기사에 백작부인의 세련된 패션 센스도 언급해드릴까요?"

 

그녀의 답변에 백작부인의 입술이 일순 굳어졌다.

 

에넌은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급히 말을 꺼냈다. "비올라 양, 아까 말씀하신 '신분제 개혁안의 사회경제학적 함의와 귀족계급 패러다임의 변동성에 관한' 취재를..." 그는 일부러 어려운 용어들을 어색하게 늘어놓았다.

 

아르젠 백작부인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군요... 중요한 취재시군요." 그녀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들킨 것이 창피한 듯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정원으로 나온 비올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에넌, 그건 너무 티 나는 변명이었어요." 그녀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은은하게 울렸다. 달빛 아래 그녀의 갈색 곱슬머리가 반짝였다.

 

에넌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왈츠 선율이 정원까지 은은하게 들려왔다.

 

에넌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비올라는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그의 손길을 따랐다. "여기서요...?"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달빛 아래서 춤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에넌이 미소지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장미정원의 달빛 아래서 둘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가을 바람이 불어올 때면, 난 당신 생각이 더욱 간절해져. 메닐의 거리를 걸을 때마다, 신문사 창가에 비칠 당신 모습을 떠올리곤 해. 웃음 짓는 당신을 보며, 내 심장이 어떤 이유로 뛰는지 알게 되었지.

 

귀족과 평민이라는 벽 앞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던가. 하지만 지금은 알아. 우리가 함께 걸어갈 길이 어디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당신이 내 곁에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이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사랑도 조금씩 자라나고 있어. 저 달빛처럼 은은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비올라, 당신은 내 인생의 빛이 되어주었어. 모두에게 당당히 말하고 싶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비올라라고. 당신 앞에 이제 한 남자로서 서고 싶다고...

 

 

달빛이 내리비치는 정원에서, 두 사람의 춤사위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에넌의 손이 비올라의 허리를 감싸고,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에 살포시 놓였다. 마치 나비가 꽃을 맴도는 것처럼 우아하게, 두 사람의 발걸음이 하나가 되어갔다.

 

에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비올라의 허리를 더욱 가까이 당겼다. 그녀의 입술이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포개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에넌..." 비올라가 입술을 떼며 작게 속삭였다. "내일은 정말 스캔들 기사가 날지도 모르겠네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함께 장난기가 묻어났다.

 

"그렇다면 나는 그 기사를 스크랩해서 평생 간직하겠어." 에넌이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이 여인을, 그는 영원히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시간은 다시 그날 오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에아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때였다. 테오필 공작은 퍼시와 브랜든을 데리고 영지의 공방과 산업체를 점검하러 떠났고, 샬럿은 집사 스벤과 함께 독서 모임으로 향하고 있었다.

 

브랜든과의 은밀한 관계가 깊어질수록, 샬럿에게서는 점점 더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피어났다. 때론 달콤하고, 때론 관능적인 그 향기는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그녀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한때 장난스럽고 천진난만했던 아가씨는 이제 한 여인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차가 천천히 달리는 동안, 샬럿은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스벤, 메닐에서의 일... 아버지와 오빠는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평민들의 시위도 계속되고 있다고 하던데..."

 

스벤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제가 평민의 입장에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사실 저희 평민들도 이런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도 느끼고 있어요. 소공작님처럼 귀족 중에서도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시는 분들이 계시니까요."

 

"저는... 라델라 가에서 일하면서 행복합니다. 하지만 모든 평민들이 저처럼 운이 좋은 것은 아니에요. 변화가 필요한 건 맞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상처받고 누군가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어요. 마치 오래된 나무를 옮겨심을 때처럼... 뿌리가 상할 수도 있지만, 더 넓은 땅에서 자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죠."

 

샬럿은 스벤의 말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변화의 물결은 단순히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아닌, 모두가 함께 겪어내야 할 성장통이었다.

 

샬럿은 창밖을 바라보며 손에 든 로맨스 소설을 무심히 매만졌다. '귀족 영애와 기사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이제 그녀에게 더 이상 흥미를 주지 못했다. 현실의 삶이 소설보다 더 복잡하고 깊어졌기 때문일까.

 

그녀의 일상은 서서히, 하지만 확실히 변화하고 있었다. 귀족 영애로서의 우아한 독서모임도, 노블레스 클럽에서의 화려한 티타임도 이제는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여성으로서, 귀족으로서의 그녀의 정체성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브랜든과의 은밀한 관계는 이 혼란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마차 창 너머로 보이는 가을 하늘은 맑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구름이 낀 듯 흐렸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귀족의 우아한 삶? 아니면 브랜든과의 금지된 사랑? 혹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찾아올 새로운 가능성? 그녀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샬럿은 스벤을 바라보았다. "스벤, 독서모임은 취소하고 산업구역으로 가자. 아버지를 뵈러..."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에 없던 진지함이 묻어났다.

 

스벤은 잠시 망설였다. 귀족 영애가 가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곳이었지만, 아가씨의 단호한 눈빛에 마부에게 방향을 바꾸라 지시했다. "네... 하지만 아가씨, 그곳은 조금..."

 

마차가 산업구역으로 접어들자, 회색빛 연기를 내뿜는 굴뚝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거리에는 검게 그을린 얼굴의 노동자들이 오가고 있었다. 샬럿보다도 어린,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의 청소년들도 보였다. 그들의 피로한 눈빛이 마차 창을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라델라 가의 보석 가공 공장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의 공장들도 즐비했다. 몇몇 공장들은 문이 닫혀있었다. '임시 휴업'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겉으로는 질서정연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12시간 이상의 노동시간, 열악한 작업환경...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 이면에 숨겨진 현실이었다.

 

샬럿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이전에도 산업구역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소년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마침내 마차가 아버지의 보석 가공 공방 앞에 도착했다. 우아한 청색 간판이 달린 건물은 주변의 다른 공장들보다는 깔끔해 보였다. 샬럿이 마차에서 내려 공방 문으로 향하려는 순간, 옆 건물에서 나오는 한 여인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평민 아가씨였다. 그녀는 앞에 서 있는 짐마차에 무언가를 싣기 위해 나오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갈색 머리카락이 묶여있었고, 작업복은 여기저기 헤져있었지만, 그녀의 움직임에는 당당함이 묻어났다.

 

 

◆

 

 

평민 아가씨의 손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작은 천 뭉치가 바람에 살짝 펄럭이며 땅에 닿았다. 샬럿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주우려 다가갔다.

 

"이거 떨어지셨..." 샬럿의 말이 목구멍에서 멈췄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평등의 횃불 상징이 새겨진 붉은 깃발이었다. 깃발 다발 중 하나가 살짝 펼쳐져, 그 위에 새겨진 불꽃 문양이 가을 햇살에 선명하게 비쳤다.

 

평민 아가씨는 재빨리 샬럿의 손에서 깃발을 낚아챘다. 그녀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경계심이 역력했다. "보지 못한 걸로 해주세요, 아가씨."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샬럿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무슨 일이 있나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평민 아가씨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도와주신다고요? 아가씨, 매일 따뜻한 침대에서 일어나 하녀들의 보살핌을 받으시면서... 우리의 삶을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12시간 넘게 일해도 겨우 먹고살 만한 임금... 손에 화상을 입어도 치료비를 내기 어려운 현실을..."

 

"하지만 저희 아버지께서는 공정한 임금을..." 샬럿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평민 아가씨가 차갑게 끊었다.

 

"공정한 임금이요? 아가씨께서는 이 깃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시겠죠? 메닐에서 일어난 시위도... 우리가 왜 거리로 나서는지도... 그저 불만 많은 평민들이라 생각하시겠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섞여있었다.

 

평민 아가씨는 깃발을 단단히 움켜쥐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귀족 아가씨, 편한 삶 속에서 우리의 고통은 그저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겠죠.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겁니다."

 

평민 아가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그것은 쓴웃음이 아닌, 자부심이 담긴 미소였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자랑스러워요. 보석을 다듬고 광을 내는 일... 5년간 숙련공으로 일하면서 제 기술을 갈고닦았죠. 어떤 원석이 최고의 빛을 낼 수 있는지, 어떤 각도로 깎아야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되는지... 그건 제 자부심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 열정이 묻어났다.

 

"하지만 아가씨, 제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평민은 자신의 보석상을 가질 수 없어요. 그래서 메닐로 가는 거예요. 그곳에선 변화가 시작되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샬럿을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어떠세요? 그 편한 삶이 아가씨에게 주는 건 뭐죠? 꿈이나 목적은요? 아니면 그저... 안락함뿐인가요?"

 

샬럿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은 마치 날카로운 바늘처럼 가슴을 찔렀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그저 귀족 영애로서의 의무만 있을 뿐... 진정한 꿈이나 목표는 없었다.

 

샬럿의 입술이 떨리며 열렸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대답을 찾지 못한 그녀의 침묵 속에서, 평민 아가씨는 마지막 짐을 마차에 실었다. 그녀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아가씨, 이 길을 선택하는 게 쉽진 않았어요. 하지만 적어도 저는... 제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고 있죠." 마차에 오르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 언젠가는 찾으시길 바랍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차가 멀어져가는 동안, 그녀의 뒷모습은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먼지 나는 길 위로 사라져가는 마차를 바라보며, 스벤은 평소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샬럿의 옆에 서서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스벤... 저택으로 돌아가자..." 샬럿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아버지는... 나중에..." 공방의 문을 등진 채, 그녀의 눈동자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어려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샬럿의 눈에는 흐릿하게만 보였다. 평민 아가씨와의 만남은 단순히 시대의 변화를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거울처럼 샬럿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공허했는지, 얼마나 무의미했는지를...

 

저택에 도착하자 평소와 달리 샬럿은 하녀의 도움도 거절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화려한 드레스가 이제는 무겁게만 느껴졌다.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 귀에 달린 다이아몬드 귀걸이... 이 모든 것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장신구를 하나씩 풀어내며, 그녀의 시선이 책장으로 향했다. 먼지 쌓인 책들 사이에서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신분제의 허상'... 서점에서 생각없이 집어왔던 책. 당시에는 관심도 없이 책장 한 켠에 처박아두었던 그 책이, 이제는 마치 그녀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

 

 

하루종일 공작님을 보필하느라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샬럿의 침실을 찾은 브랜든은, 문을 노크했다. "아가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침실 안으로 들어선 브랜든의 눈이 커졌다. 평소와 달리 드레스도 벗어던진 채 간단한 실크 가운만 걸치고, 책상 앞에 웅크린 샬럿의 모습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신분제의 허상', '평등사회론', '혁명의 시대' 등 정치서적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브랜든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 책들을 훑었다. "이런 책들은... 아가씨께 적절하지 않을 수도..."

 

샬럿의 눈가에 맺힌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브랜든은 무언가 큰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샬럿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브랜든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담긴 보호하려는 의도가 오히려 그녀를 짜증나게 했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데... 아니, 어쩌면 부끄러운 걸까? 자신의 무지함이,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 같은 모습이.

 

"브랜든..." 샬럿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나를 더 이상 아이 취급하지 마. 이 책들이 적절하지 않다고? 그럼 무엇이 적절한데? 로맨스 소설? 자수? 아니면 귀족 영애의 예절?"

 

그녀의 말에 브랜든은 놀란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성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책상 위의 책들을 정리하려던 손을 멈추었다.

 

달빛이 침실 창가로 스며들었다. 브랜든은 샬럿의 옆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내 삶이... 점점 멀게 느껴져." 샬럿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브랜든과 나 사이에 있는 이 벽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브랜든은 잠시 침묵했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씨도 변하고 계시죠. 하지만 그 변화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아가씨께서는 지금 깨어가고 계신 겁니다."

 

그는 책상 위의 책들을 가볍게 쓸어보았다. "이런 고민을 하시는 것 자체가, 아가씨께서 성장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든, 그것은 아가씨의 몫이 될 테지만... 제가 곁에서 지켜보며 돕겠습니다."

 

샬럿은 브랜든의 말에 작게 미소지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빛처럼, 그의 말은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은은한 빛이 되어주었다.

 

달빛이 스며드는 침실에서, 브랜든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교차했다. 한편으로는 라델라 가의 전통과 체면을 지키며 샬럿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성장을 지지하며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그의 내면은 마치 지금의 델바론 왕국처럼 양분되어 있었다. 보수와 개혁,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샬럿이 있었다.

 

"아가씨..." 브랜든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샬럿에게 다가갔다. 그의 품 안으로 그녀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제가 늘 곁에 있겠습니다."

 

그의 포옹은 따뜻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신뢰와 애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브랜든은 자신의 품 안에서 약간 떨리는 샬럿의 어깨를 느끼며, 그녀를 더욱 단단히 안았다.

 

 

◆

 

 

샬럿은 쑥스러운 듯 브랜든의 품에서 살짝 떨어졌다. 그동안 둘 사이에 이런 진지한 대화는 처음이었다. 달빛 아래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고, 그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브랜든... 오늘 밤은... 내 곁에 있어줘." 샬럿의 목소리가 달빛처럼 부드럽게 울렸다.

 

브랜든의 가슴이 크게 울렸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내일의 일정이 떠올랐다. 테오필 공작이 광장 시위 현장에 참석해야 하기에 영지를 떠나는 날이었다. 브랜든은 그를 보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브랜든은 잠시 망설였다. 샬럿이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집사장으로서의 의무도 저버릴 수 없었다. 그의 내면에서는 또다시 상반된 감정이 충돌했다.

 

"아가씨..."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일은 공작님께서..." 하지만 그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샬럿의 눈빛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샬럿은 브랜든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래서 더 지금이 필요해... 내일이면 떠나버릴 테니까."

 

그녀의 말에 브랜든의 이성이 흔들렸다. 달빛 아래 그녀의 금발이 은은하게 빛났고, 연갈색 눈동자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있었다.

 

"아가씨..." 브랜든이 망설이며 말을 꺼내려 할 때, 샬럿이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오늘만큼은... 집사가 아닌 내 연인으로 있어줘, 브랜든." 그 한마디에 브랜든의 마지막 망설임이 무너져내렸다. 그는 샬럿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찾았다.

 

그들의 관계는 이제 단순한 호기심이나 일시적인 희열을 넘어선지 오래였다.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이 손끝에서 전해졌다. 브랜든의 손길이 샬럿의 등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고, 그녀는 그의 품에 더욱 깊이 안겼다.

 

브랜든은 샬럿을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그녀의 몸이 그의 품 안에서 가볍게 떨렸다. 달빛이 비치는 침실에서, 그는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브랜든..." 샬럿의 목소리가 떨렸다. 브랜든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목선을 따라 내려갔다.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훑었다.

 

검열! 삭제!

 

브랜든은 샬럿의 이마에 다정한 입맞춤을 하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

 

 

브랜든이 샬럿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달빛이 창문으로 비치는 침실 안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고요히 울렸다.

 

"샬럿..."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밤이, 당신이... 모든 것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달빛은 여전히 창가에 머물러 있었고, 밤바람이 부드럽게 커튼을 흔들었다. 이 순간, 그들은 신분도, 지위도 잊은 채 오직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

 

 

이른 아침, 라델라 공작저는 이미 분주한 움직임으로 가득했다. 집무실에서는 테오필 공작과 퍼시, 그리고 브랜든이 메닐 행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퍼시, 광장 시위 예상 인원은?" 테오필이 창 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미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퍼시가 차분히 대답했다.

 

테오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변화... 피할 수 없는 걸까." 그의 목소리에는 체념과 결단이 섞여 있었다.

 

"공작님, 변화는 때로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브랜든이 공손히 말했다. "라델라 가문은 언제나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왔습니다."

 

라델라 공작저의 1층 홀이 분주한 발걸음으로 가득찼다. 테오필 공작과 퍼시의 메닐 행을 배웅하기 위해 코델리아 공작부인과 샬럿, 그리고 사용인들이 모두 모였다.

 

"부디 안전하게 다녀오시길..." 코델리아가 테오필의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테오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의 손을 잡았다.

 

브랜든이 마차에 오르려던 순간, 샬럿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브랜든!" 

 

브랜든이 뒤를 돌아보자, 샬럿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어제 밤의 달빛처럼 애틋함이 어려 있었다.

 

"부디... 아버지와 함께 안전하게 다녀와."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브랜든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마차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망설이다가, 자켓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곳에서 꺼낸 것은 작은 상자 하나. 그 안에는 샬럿이 시장 좌판에서 눈여겨보았던 헤이즐빛 마노석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전에... 개인적인 선물은 주제넘은 일이라며 거절했었지만," 브랜든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이제는 드릴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받아주시겠습니까?"

 

샬럿이 목걸이를 받아들자, 가을 아침 햇살이 마노석에 반사되어 따스한 빛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쥐었다.

 

마침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을 아침의 선선한 바람이 저택 앞뜰을 스쳐 지나갔다. 테오필 공작은 창 밖으로 보이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마음 속에는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걱정과, 딸의 행복에 대한 고민이 교차했다.

 

샬럿은 브랜든이 준 목걸이를 꼭 쥔 채,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걱정과 결의가 함께 어려 있었다. 코델리아는 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무언의 위로를 전했다.

 

브랜든은 마차 안에서 저택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손끝에는 아직도 목걸이를 건넸을 때의 떨림이 남아있었다. 퍼시는 조용히 서류를 정리하며, 일정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메닐에서의 시위...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변화를 모두가 예감하고 있었다.

 

 

◆

 

 

메닐의 라델라 공작가 별채는 본가만큼 크진 않았지만, 도시 중심가에 위치한 우아한 저택이었다. 마차가 도착하자 에넌이 현관에서 아버지를 맞이했다.

 

"아버지, 어서 오십시오." 에넌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최근 메닐의 상황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서재로 자리를 옮긴 후, 에넌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델라 보석상의 매출이 지난달 대비 30% 가량 감소했습니다. 귀족들의 소비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평민들의 불매운동도 한몫했습니다. 그리고..."

 

에넌은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비앙카라는 언론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테오필은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넌,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라. 나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이전의 강경한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와 함께 묘한 결단이 묻어났다.

 

에넌의 머릿속에는 어느 특별한 붉은 새가 떠올랐다.

 

비올라... 그녀와 나눈 수많은 대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버님... 제가 알고 지내는 이가 있습니다. 그녀는..." 에넌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마치 자유를 상징하는 붉은 새처럼,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었습니다. 때로는 날카롭지만, 진실된 목소리로..."

 

테오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이전과 달리 부드러웠다. "네가 좋은 사람을 만났다면... 그걸로 충분하구나."

 

에넌은 아버지의 말에 숨죽인 미소를 지었다. 이제 라델라 가문은 새로운 길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이틀 뒤의 광장 시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랜든과 퍼시는 조용히 뒤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별채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모두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메닐에 도착한 행렬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작업복 차림 그대로였고, 상인들은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젊은 학생들은 책가방을 메고 있었고, 노인들은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걸었다.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희망과 결의가 가득했다. 붉은 깃발이 가을 하늘 아래 펄럭였고, '평등'이라는 외침이 거리를 울렸다.

 

"에넌, 시위 당일엔 내 곁을 지켜다오." 테오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의 말에는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브랜든,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브랜든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

 

 

메닐에서의 대규모 시위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오늘, 라델라 본저택의 창가에 서서 영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코델리아의 어깨가 떨렸다.

 

저 멀리 로에아의 대로를 따라 메닐로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머니..." 샬럿이 코델리아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안았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와 에넌 오빠는 브랜든이 지키고 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코델리아가 딸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저 많은 사람들...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었는데..."

 

창 밖으로는 행렬이 지나간 자리에 흩날리는 전단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그것들을 주워들었다. 샬럿의 시선이 그들을 좇았다.

 

행렬이 지나가고 거리가 조용해진 후, 샬럿은 저택 앞 정원으로 나왔다. 바람에 흩날리는 전단 하나가 그녀의 발치에 떨어졌다. 코델리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창 너머로 딸을 지켜보고 있었다.

 

샬럿이 전단을 집어 들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횃불이 밝히는 길을 따라,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입니다. 메닐의 광장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울릴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횃불'이 들어올려 질 때, 우리의 의지는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혼란 속에서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평등을 위하여"

 

샬럿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샬럿이 전단을 쥐고 저택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대리석 복도를 울렸다. 코델리아가 놀란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지만, 샬럿은 멈추지 않고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테오필이 떠난 후에야 도착했던 그 검은 봉인의 편지... 발신인도, 수신인도 없던 그 수상한 편지를 집어들었다.

 

"가을 사냥에 대한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사냥개들은 이미 훈련을 마쳤고, 특히 '메닐'의 사냥터에서 사용할 새로운 방식을 시험해보았습니다.

 

사냥 중 발생할 수 있는 우발적 상황에 대비하여, 모든 참가자들은 안전한 장소로 신속히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횃불'이 들어올려지는 순간에는 더욱 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샬럿의 손이 떨렸다. 전단과 편지를 나란히 놓고 읽어보니, 그 유사성이 선명했다. '횃불'이라는 단어가 두 문서 모두에서 강조되어 있었고, 메닐에서의 행동을 암시하는 문구들이 겹쳐보였다.

 

샬럿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메닐에서 곧 일어날 불길한 사건의 그림자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동안 귀족 영애로서 누려온 안락한 삶, 아무런 꿈도 목표도 없이 살아온 시간들이 마치 유리 온실 속 장미처럼 허상으로 느껴졌다.

 

샬럿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어머니, 지금 바로 메닐로 가야해요. 아버지와 에넌 오빠가 위험할지도 몰라요!"

 

스벤이 준비한 마차가 저택을 출발했다. 길가에는 여전히 메닐로 향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붉은 깃발, 그리고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열망이 가을 하늘 아래 펼쳐졌다. 모든 것이 메닐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운명의 물줄기가 한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메닐의 거리를 휘감고 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부터,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가 마치 강물처럼 광장으로 흘러들었다. 붉은 깃발이 새벽하늘을 수놓았고, 그에 맞서듯 왕실의 푸른 문양이 새겨진 깃발도 하나둘 솟아올랐다.

 

귀족들의 마차가 도착할 때마다, 그들을 지지하는 보수파 서민들이 왕실의 휘장이 그려진 깃발을 높이 들었다. 마치 피와 하늘이 대립하듯, 붉은색과 푸른색이 광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교묘하게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면서도, 왕실의 권위를 방패삼아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다.

 

광장 중앙에는 수도 경찰들이 철갑을 두른 듯 견고한 방벽을 형성했고, 왕실 근위병들은 마치 살아있는 조각상처럼 발언대를 감싸고 있었다. 그들의 창끝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두 진영의 사람들이 마치 조수처럼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며, 긴장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침 햇살이 광장을 비추는 가운데, 두 거인이 마주섰다. 평등의 횃불을 이끄는 알렉산더 레인과 보수파의 수장 라이언 후작.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라이언 후작의 입가에 스치는 희미한 미소가 마치 독사의 혀처럼 불길했다.

 

테오필 공작의 시선이 광장을 둘러보았다. 평소라면 가득했을 지역 영주들의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왕세자 로엔이 발언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연두색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우리는 하나의 왕국입니다. 평화로운 변화를 위해, 개혁파의 의견을 점진적으로 수용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의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소란스러웠던 군중이 잠잠해졌다.

 

발언대 뒤편에서는 테오필 공작과 에넌이 정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에넌의 시선이 끊임없이 군중 속을 헤매었다. 그가 찾는 것은 붉은 베레모, 그의 마음을 빼앗아간 그 특별한 '새'였다.

 

라이언 후작이 발언대에 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숨겨진 날카로움이 광장을 가르며 울렸다. "우리는 왕세자님의 현명한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평등의 횃불이 그동안 보여준 폭력적인 행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의 붉은 깃발이 우리의 거리를 얼마나 어지럽혔는지..."

 

알렉산더 레인이 단상에 올랐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타올랐지만, 목소리는 차분했다. "우리의 행동을 폭력이라 말씀하시니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수백 년간 이어진 귀족들의 특권이야말로 가장 큰 폭력 아니었습니까?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평등의 횃불은..."

 

알렉산더 레인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우렁차게 외쳤다. "횃불을 들어 우리의 뜻을...!" 

 

그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군중 속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평등을 위해!

 

총성이 광장을 가르며 울렸다. 한 발의 총성이 마치 폭풍우의 시작을 알리는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쓰러진 노인을 부축하는 청년, 날아가는 모자들, 찢어지는 깃발들... 근위병들이 즉시 인간 벽을 만들어 왕세자를 보호했다. 로엔 왕세자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혼란에 빠진 광장을 바라보며 호위병들에 둘러싸여 자리를 떠났다.

 

광장은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했다. 비명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공중에는 먼지가 자욱했다. 어디선가 두 번째 총성이 울렸다. 브랜든과 퍼시가 즉시 테오필 공작을 감쌌다.

 

"소공작님! 어서 이쪽으로!" 브랜든의 외침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에넌의 귓가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넌!" 테오필 공작의 절박한 외침이 울렸다.

 

"돌아와!" 하지만 에넌은 이미 지옥도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순간 바람에 흩날리더니,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테오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퍼시가 마차 문을 열었다. "공작님, 서둘러 주십시오." 브랜든이 테오필을 마차로 안내하는 동안, 또 다른 총성이 울렸다.

 

 

◆

 

 

샬럿이 도착했을 때, 광장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비명소리와 총성이 뒤섞여 울렸다. 어디선가 연기가 피어올랐고, 사람들은 마치 광기에 물린 듯 서로를 밀치며 도망쳤다. 그녀의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저 멀리 브랜든의 검은 테일코트가 보였다. 그가 아버지를 보호하며 마차로 향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브랜든이..."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 스벤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가씨! 위험합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흥분한 군중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누군가의 비명, 깨지는 유리창 소리, 그리고 또 다른 총성이 뒤섞였다.

 

스벤이 샬럿을 마차로 이끌려 했지만, 광기어린 함성과 함께 흥분한 군중이 마차를 에워쌌다. 깃발이 휘둘러지고,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마치 폭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했다.

 

샬럿은 순간 스벤의 손을 놓쳤고, 그녀의 연갈색 눈동자에 공포가 스쳤다. 도망치는 인파에 휩쓸려 그녀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마치 거센 강물에 휩쓸린 꽃잎처럼.

 

 

◆

 

 

에넌이 아수라장이 된 광장을 헤집고 다녔다. 그의 발걸음마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광장 가장자리에서는 인파에 짓밟힌 여인들이 실려 나가고 있었다. 갈색 머리의 여인을 발견할 때마다 그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가 다시 뛰었다.

 

뒤엉킨 사람들 사이로 그 붉은 베레모가 보였다. 비올라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빛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마치 폭풍우 속 한 마리 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비올라!" 에넌의 절규가 광장을 울렸다.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에넌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마치 신분의 벽처럼, 계급의 강처럼 건널 수 없는 거리였다. 군중의 물결이 그들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허공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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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든 오스본 First Ending : 비극, 두 개

브랜든 First Ending : Twin Tragedies

 

 

 

브랜든 오스본 뤼튼 페이지 @예리엘

세이프티 필터 적용 캐릭터 | 뤼튼 캐릭터

 

 

 

 

두 번째 엔딩은 추후 기록 예정입니다 (이 난장판 어떻게 치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