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린든 (7) Beloved Bird

뤼튼 캐릭터챗 '일라이 린든'
create by 예리엘
edited by 베이글

 

 

 

 

 

---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린든하우스의 천장, 나의 작은 둥지에서 눈을 떴다. 어제의 무도회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벨레카 영애의 당당함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어...' 나는 작은 부리로 깃털을 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일라이의 금발이 희미한 새벽빛에 반짝였다. 그가 아직 잠들어있었다. 나는 살며시 둥지에서 내려와 그의 머리카락 가까이로 날았다.

 

작은 볼을 그의 머리카락에 부비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이내 멈췄다. "삐익... (안돼... 이런 식으로는...)"

오늘은 그를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결심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벨레카 영애처럼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전할 것이다.

 

창가에 앉아 날개를 털며, 나는 조용히 아침을 맞이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점점 밝아져 갔다.

일라이가 아침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허브티를 우리는 향기가 서재를 가득 채웠다. 나는 둥지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금발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어제의 무도회에서 입었던 테일코트는 의자에 걸려있었다.

"삐이삐이...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일라이.)"  나는 작은 소리로 지저귀었다.

 

"삐익... 삐이... (당신을 좋아해... 그런데 왜 이렇게 말하기가 어려운 걸까...)"

 

내 진심이 담긴 지저귐은 그저 새소리일 뿐이었지만,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일라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삐삐, 나 다녀올게." 그가 미소지었다. 

 

나는 그의 미소에 답하듯 날개를 살짝 펄럭였다. 일라이는 내 마지막 지저귐을 들으며 서재를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가로 날아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왕립도서관의 아침은 조용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

조안이 평소와 달리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서가 사이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의 회색 곱슬머리는 평소보다 더 헝클어져 있었고, 주근깨 가득한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세드리안이 밤새 열이 심했어." 조안이 입을 열었다. "사브리나가... 내가 마침 거기 있었는데..."

 

그는 말을 하다 멈췄다. 자신이 밤늦게 사브리나의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실수로 말해버린 것을 깨달은 듯했다. 평소의 오만한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누군가를 걱정하는 한 남자의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일라이는 조안을 바라보았다.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그의 모습이 아닌, 진심으로 누군가를 걱정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근하게 느껴졌다.

 

벨레카의 진심, 페이의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지금 조안의 모습까지...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복잡하고 다채로운 것인가.

"가보세요." 일라이가 말했다. "오늘은 제가 대신 할게요." 조안이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만 이에요... 다음은 없어요." 일라이는 덧붙였다.

 

조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서둘러 도서관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일라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모두가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보여주는 것 같았다.

도서관은 평소보다 한층 더 조용했다. 

 

일라이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반납된 책들을 정리하고, 대출 기록을 작성하고, 방문객들의 문의에 답했다.

 

바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으니까.

그는 문득 자신이 아침부터 허브티 한 잔 마시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은은한 얼그레이 향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붉은 곱슬머리를 한 아가씨가 등나무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멀찍이 서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작은 찻주전자와 티컵이 보였다. 

 

일라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이, 자신의 일상을 살펴봐주는 것이 이상하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 해티가 그랬던 것처럼.

---

도서관 뒷편 안뜰은 조용했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가운데, 일라이와 페이는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페이가 가져온 등나무 바구니에서는 따뜻한 허브티와 함께 작은 샌드위치가 나왔다.

"어제 무도회는 즐거우셨나요?" 페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붉은 곱슬머리가 살랑이는 바람에 춤추듯 흔들렸다. 

 

일라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네... 처음 경험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제의 복잡했던 감정들이 묻어났다.

"저도 그래요." 페이가 미소 지었다.

 

"에젤의 라벤더 언덕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아요." 그녀의 말에 일라이도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었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게.

식기를 정리하며 페이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시선을 테이블에 고정한 채,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저... 새 알레르기가 없어요. 사실 전혀 없어요."

일라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의 서재에 있는 삐삐를 떠올렸다. 매일 아침 자신을 바라보던 그 새의 모습과, 지금 눈앞의 페이가 왠지 모르게 겹쳐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럼 언젠가 삐삐를 소개해드려도 되겠네요."

페이는 순간 손동작을 멈췄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네... 그러시겠죠."

 

일라이는 그녀가 왜 이런 작은 사실을 고백하듯 말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 한마디가, 어제 벨레카의 당당한 고백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페이는 마지막 도시락 통을 닦으며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사실... 전 일라이 씨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어요."

 

"매일 아침 허브티를 마시는 것, 가끔 창가에서 에젤을 그리워하며 먼 곳을 바라보는 것, 책을 정리할 때 살짝 미소 짓는 습관까지..."

일라이는 놀란 듯 페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일상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세세하게 관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가... 그렇게 뻔했나요?" 그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페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저 제가..."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해요... 이상하게 들리시죠?" 그녀의 손가락이 도시락 통 테두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아뇨..." 일라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저... 놀랐을 뿐입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페이는 이미 자신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일까.

페이는 마침내 일라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결심한 듯한 빛이 어렸다.

 

"사실... 제가 일라이씨를 처음 본 날은..."

---

"일라이 씨." 벨레카의 목소리가 안뜰에 울려 퍼졌다. 자줏빛 드레스를 입은 벨레카가 다른 귀족 아가씨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아, 이렇게 둘 다 계시니 더 좋네요." 벨레카가 우아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소개해드릴게요. 이분은 로웰 가문의 클라리스 영애예요. 린든하우스 뒷집의 진짜 주인이시죠."

페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마치 발이 땅에 붙어버린 듯 그 자리에 서있었다. 

 

클라리스는 우아하게 미소지으며 페이를 바라보았다.

 

"아드리안 가의 영애께서 저희 집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어요. 특히... 빈집이라고 소문내고 다니셨다면서요?"

일라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페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페이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붉은 곱슬머리가 얼굴을 가렸다.

"거짓말을 하시려면 좀 더 신중하게 하셨어야죠." 클라리스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 집은 제가 어릴 적부터 살던 곳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곳이 빈집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닌다니, 참 재미있더군요."

벨레카는 상황이 불편해졌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클라리스..."

 

그녀가 제지하려 했지만, 클라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드리안 가의 영애께서 이런 식으로 남자분을 쫓으실 줄은 몰랐네요."

일라이는 페이를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와 함께 나누던 허브티의 향기, 책을 읽을 때 흘리던 작은 미소, 둘이서 나눈 진솔한 대화... 그 순간들은 분명 진실이었다.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자신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고 생각했던 그 배려와 관심이, 결국 계획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무겁게 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그랬듯, 페이도 자신에게 접근하기 위해 거짓말을 선택했다는 것. 그동안 쌓아온 신뢰가 허상 위에 지어진 것만 같았다.

일라이는 삐삐를 떠올렸다. 그 작은 새는 아무런 거짓 없이, 그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찾아왔다. 하지만 페이는...

---

페이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늘은 모든 진실을 고백하려 했다.

 

새 알레르기에 대한 거짓말부터, 자신이 린든하우스 근처에 머무는 이유까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신의 정체까지. 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의 거짓말이 이토록 깊게 꼬리를 물고 있었다니. 일라이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보며 그녀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클라리스 영애..." 페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녀의 붉은 곱슬머리가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떨어졌다.

"적어도 저는," 벨레카가 목소리를 높였다.

 

"일라이 씨에게 거짓말한 적은 없어요." 그녀의 말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제 마음도, 제가 누구인지도 모두 솔직했죠." 그 말은 마치 날카로운 화살처럼 페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거짓말이 쌓여가는 동안, 벨레카는 늘 당당하게 자신의 진심을 전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라이는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다물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마치 어제 무도회에서 벨레카의 고백 앞에서 서툴렀던 것처럼, 지금도 그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괴로워했다.

 

페이의 떨리는 어깨를 보며, 그는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미숙했다.

"클라리스 영애... 제가 오늘 중으로 집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페이가 조용히 말했다. 

 

페이가 몸을 돌리는 순간 일라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일라이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을 내딛었다.

 

"일라이 씨." 벨레카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진지함이 묻어났다.

 

일라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페이의 붉은 곱슬머리가 안뜰을 벗어나며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클라리스가 도서관으로 사라지자, 벨레카는 일라이와 단둘이 남았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일라이 씨, 페이 아가씨의 일은 유감이에요. 하지만 오늘 제가 찾아온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벨레카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미델 가문에서 왕실 계보도 복원 프로젝트에 일라이 씨를 추천했어요. 아버지께서... 일라이 씨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셨거든요."

 

그녀의 말에 일라이는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더 큰 자리로 나아가실 수 있어요. 미델 가문이 후원하겠다고 하셨어요." 벨레카의 눈빛이 진지했다.

하지만 일라이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의 시선은 자꾸만 페이가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벨레카는 그런 일라이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전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일라이 씨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보이네요. 꿈에 대해서도, 페이 아가씨에 대해서도..."

일라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 한켠에서는 여전히 페이의 떨리던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녀가 전하려 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자신의 꿈, 에젤로 돌아가 도서관을 세우겠다는 그 꿈은... 이 기회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

린든하우스의 주방에 앉아 일라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왕실 계보도 복원 프로젝트... 그것은 단순한 문서 복원 작업이 아니었다.

 

엘리너 왕비의 혈통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알라릭 왕은 이 문제를 영구히 해결하기 위해 전면적인 계보 조사를 결정한 것이다. 전국의 실력 있는 문헌 복원가들이 모여 수백 년간의 왕실 문서를 검토하고 복원하게 될 것이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방 뒷문을 지나 조용한 뒷집으로 향했다. 이제는 텅 비어있을 그 집. 페이는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리고 자신은 왜 그녀를 붙잡지 못했을까? 아침에 그녀가 전하려 했던 이야기...

 

그 뒤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더 있었을까? 일라이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탓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붕 종보의 작은 둥지에서는 삐삐의 하얀 꼬리깃만이 살짝 보였다. 평소라면 저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노래하곤 했는데, 오늘은 유독 조용했다. 마치 페이처럼... 일라이는 문득 두 존재가 겹쳐 보이는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그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놓여있었다. 미델 가문이 제시한 더 큰 꿈으로 가는 길과, 자신이 품어온 에젤의 작은 도서관이라는 꿈. 그리고 그 사이에 자꾸만 떠오르는 페이의 떨리던 목소리가 있었다.

---

"삐삐야..."

익숙한 목소리에 하얀 깃털을 푸르르 떨었다. 일라이의 손길을 기다리며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날개를 펴고 그의 손으로 날아갔다. 그의 손바닥은 늘 그랬듯 따뜻했다.

"삐이..." (미안해...)

작게 울며 일라이의 손가락에 부리를 비볐다. 이제는 이렇게 그의 곁에 있는 것조차 미안했다. 거짓말로 시작된 관계, 그리고 계속된 거짓말들... 일라이는 내 진짜 모습을 모른 채, 그저 작은 새를 향한 순수한 애정으로 나를 쓰다듬고 있었다.

"삐삐이..." (이제 곧 떠나야 해요...)

일라이의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아드리안 가의 영애로서도, 작은 새로서도 더 이상 그의 곁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여전히 따뜻했고, 그래서 더욱 가슴이 메었다.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순간만큼은 그의 손길 아래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

새벽녘, 일라이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둥지를 향해 시선을 던졌지만, 삐삐는 어제부터 계속 조용했다. 평소라면 그가 일어나는 소리에 깃을 털며 반갑게 맞이했을 텐데, 오늘은 둥지 안쪽 깊숙이 숨어있는 듯했다.

"삐삐야, 나 가볼게." 일라이가 조용히 인사했지만, 둥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뒷집을 한 번 바라보니, 로웰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짐마차에서 인부들이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묵묵히 뒷집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클라리스 영애의 지시로 집을 정리하러 온 것 같았다.

담벼락 위의 까망이가 일라이를 향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한숨을 푹 내쉬는 듯했다. 일라이는 까망이를 바라보다가,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왕실 계보도 프로젝트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봐야 했다.

왕립도서관의 회의실은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알라릭 왕의 앞에는 렌디아에서 손꼽히는 복원 전문가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가장 젊은 일라이는,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무겁게 느끼고 있었다. 특히 조안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불편했다.

"엘리너 왕비의 가문, 라벤더 가의 계보도는 100년 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새로 제작되었습니다." 한 전문가가 설명했다.

 

"하지만 새로 만들어진 계보도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력들이 있어..." 알라릭 왕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일라이는 이 프로젝트가 단순한 문서 복원이 아님을 직감했다. 이것은 왕비의 명예, 나아가 왕실의 정통성과 관련된 중대한 일이었다.

"린든 군과 얼레인 자작, 두 사람이 라벤더 가의 계보도를 담당하게." 알라릭 왕의 시선이 일라이와 조안에게 향했다.

 

"새로운 계보도의 모든 내용을 검증하고, 왕실 문서와의 연관성을 찾아주게."

 

일라이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의 앞에 놓인 문서들은 엘리너 왕비의 가문이 새로 제작했다는 계보도였다. 일라이와 조안은 이 계보도의 정확성을 검증하고, 이를 왕실 계보도에 올바르게 이식하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넓은 테이블 위로 펼쳐진 계보도를 바라보며 일라이와 조안이 마주 앉았다. 평소 게으름을 피우던 조안도 오늘만큼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흰 장갑을 낀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계보도를 넘기며, 라벤더 가문의 혈통 기록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우선은 라벤더 가와 혈연으로 이어진 가문들을 역추적해야 할 것 같군." 조안이 중얼거렸다.

 

"100년 전의 화재 이전 기록들을 찾아야 해. 각 가문들을 직접 방문해서 확인하는 게 가장 확실하겠지."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메모장에 방문해야 할 가문들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내일부터 바로 시작해야겠어요." 일라이가 말했다. "꽤 오래 걸릴 수도 있겠어요. 각 가문마다 보관 중인 문서들을 전부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의 말에 조안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번엔 정말 제대로 해야 해. 전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문서를 복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해가 저물어갈 무렵, 일라이는 무거운 책들을 안고 린든하우스로 돌아왔다. 평소보다 더 많은 책과 문서를 들고 온 탓에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나무 향이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집 안의 공기가 묘하게 달랐다.

"삐삐야, 오늘은 정말 대단한 일이 있었어." 일라이는 평소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재로 올라가며 그는 자연스럽게 둥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왕실 계보도 복원 프로젝트라고... 내가 맡게 됐어." 둥지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린든하우스는 겉보기에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공허했다. 테라스의 은색 티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허브티 잔은 그대로였고, 거실의 크리스털 화병에는 여전히 꽃이 꽂혀있었다.

 

하지만 뭔가가 달랐다. 집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라이는 문득 뒷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늘 아침 보았던 짐마차의 흔적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서재 책상에 앉았다. 왕실 계보도 프로젝트에 대해 생각하려 했지만, 자꾸만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을바람이 차가워지는 동안, 일라이의 발걸음은 바빠졌다. 그는 조안과 함께 라벤더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귀족 가문들을 순차적으로 방문했다. 각 가문의 서고에서 오래된 문서들을 찾아내고, 계보도를 대조하고, 필요한 부분은 꼼꼼히 필사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가끔은 조안이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일라이는 묵묵히 작업을 이어나갔다.

늦은 밤, 린든하우스의 서재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일라이는 책상 위에 펼쳐진 문서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의 흰 장갑에는 잉크 자국이 남아있었고, 촛불 아래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테라스의 둥지는 여전히 조용했다. 다만 아침마다 모이통이 비어있는 것을 보면, 삐삐는 그가 없는 시간에 살짝 내려와 먹이를 먹고 가는 듯했다.

일을 마무리하며 일라이는 책상 한켠에 놓인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아드리안 가문의 고급 편지지였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쓰려다 말고 펜을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뒷집은 이제 완전히 비어있었다. 일라이는 한숨을 쉬며 침실로 향했다. 오늘도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의문이 맴돌았다. 라벤더 가의 계보도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

깊어가는 밤, 린든하우스의 창가에 한 실루엣이 비쳤다. 달빛 아래 구불거리는 붉은 곱슬머리가 희미하게 빛났다. 페이는 조용히 일라이의 서재로 들어섰다. 책상 위에는 일라이가 정리해둔 라벤더 가문의 계보도와 문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문서들을 조심스럽게 훑었다. 일라이의 반듯한 필체로 적힌 메모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업물들... 

 

그의 노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흔적들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종이를 적셨다. 그녀는 서둘러 손수건으로 눈물자국을 닦아냈다.

마지막으로 페이는 책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그것은 진청의 눈물보다 더 깊고 진한 남색 잉크였다. 아드리안 가문의 비밀 레시피로 만든, 아직 세상에 선보이지 않은 새로운 걸작이었다. 

 

달빛에 비친 잉크병 속 액체가 찰랑거렸다.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깊고 어두운 푸른빛이었다.

 

페이는 잠시 책상 위에 놓인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아픈 고백이 되기도 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잠든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잠든 일라이의 얼굴은 늘 그렇듯 고요했다. 책을 읽다 잠든 듯 안경도 벗지 않은 채였다.

'작은 새와 달빛 정원'... 그가 읽어주던 동화 속에서처럼, 나도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구나. 하지만 동화 속 새와는 달리, 나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의 뺨에 살짝 얼굴을 대며 마지막 온기를 느꼈다. 내 깃털이 스치자 그가 미소 지었다. 아마도 꿈속에서 무언가 좋은 것을 느낀 걸까.

'잘 있어, 일라이.'

창문으로 날아오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이제 나는 진짜 여행을 떠나야 해. 처음 계획했던 대로, 왕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여행. 하지만 가장 소중한 이야기는 이미 여기, 린든하우스에서 만들어졌는걸. 달빛 아래 하얀 깃털 하나가 살포시 떨어졌다.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이.

'안녕, 일라이. 당신의 삐삐는 이제 자유롭게 날아가려 해요. 하지만 제 마음은 언제나 이곳에, 당신 곁에 머물러 있을 거예요.'

---

가을이 깊어가는 동안 왕립도서관은 여전히 바빴다. 그는 라벤더 가문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모든 기록을 꼼꼼히 검증했다. 책상 위에는 각 귀족 가문들에서 가져온 문서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내가 주도적으로 진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조안이 으스대며 말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작업은 일라이가 해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바쁜 것이 그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머릿속을 맴도는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으니까.

책상 한켠에는 여전히 그 남색 잉크병이 놓여있었다. 그는 가끔 그 잉크로 중요한 문서를 필사했다.

 

깊고 진한 색채는 마치 누군가의 눈동자처럼 그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푸른빛이 종이 위에 번질 때마다, 왠지 모를 그리움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을 곧바로 일에 파묻었다.

테라스의 둥지는 이제 완전히 비어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매일 아침 모이를 채워두었다. 어쩌면 그것은 습관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다림이었을지도.

---

아드리안 백작가의 마차는 서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우아한 아가씨의 모습으로, 때로는 하얀 깃털의 작은 새로 변신하며 왕국을 여행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들은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풍경들은 낯설지 않았다.

산맥 너머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며, 그녀는 그가 들려주었던 동쪽 산맥의 일출 이야기를 떠올렸다.

 

깊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강물을 보며, 그가 책을 통해 들려주었던 물의 여정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그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의 깊고 검은 눈동자에 그리움이 차올랐지만,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그 추억마저 접어둬야 할 시간이었다.

마차는 점점 더 서쪽으로 향했다. 에젤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가 자라난 그 작은 마을, 라벤더 언덕이 있는 곳.

마차가 서부로 향하는 동안, 페이의 마음 한켠에는 린든하우스의 테라스와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

라벤더 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벤더 향기가 공기 중에 은은하게 맴돌았다. 페이는 마차에서 내려 언덕을 바라보았다. 일라이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제가 자란 에젤은... 라벤더가 만개해서 온 언덕이 보랏빛으로 물들죠. 어머니는 그 언덕의 라벤더로 차를 만들곤 했어요. 지금도 그 향을 잊을 수가 없네요."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우체통이 서 있었다. 녹슨 우체통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자 낡은 갈색 오두막이 보였다. 린든 헌책방이었다. 일라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2층 창문 옆에 키를 잰 자국들이 있어요. 어머니가 매년 내 키를 재주셨죠. 아버지는 투덜거리면서도 항상 옆에서 자를 들고 계셨고요."

페이는 천천히 마을을 걸었다. 허브 향이 가득한 힐링찻집을 지나며 일라이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릴 적엔 이 찻집 앞을 지날 때마다 허브 향에 취했어요. 해티는 가끔 이곳에서 허브를 사서 특별한 차를 만들어주셨죠. 지금도 그 맛이 생생해요."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에젤의 풍경이 담겼다.

낡은 나무로 된 헌책방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책방 안은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오래된 책들이 빼곡히 들어찬 나무 책장들 사이로 허브 향이 은은하게 퍼져있었다. 일라이가 말했던 것처럼,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어서 오시오, 젊은 아가씨."

책상 뒤에서 백발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둥근 안경 너머로 사나운 눈매가 페이를 바라보았다. 일라이의 양아버지, 엘머였다. 그는 책을 보수하다 말고 손에 들고 있던 가죽 장갑을 내려놓았다.

"혹시... 특별히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소?"

엘머의 목소리는 까칠했지만, 그 안에 따뜻함이 묻어났다. 페이는 그의 모습에서 일라이를 볼 수 있었다. 책을 다루는 섬세한 손길, 진지한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 책들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빛까지.

"네, 저는..." 페이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벽면에 걸린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소년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어린 일라이였다. 그의 옆에는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해티일 것이다. 페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에젤에 대한 책을 찾고 있어요." 페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책이 아닌 곳곳을 맴돌았다.

 

오래된 책장 사이로 난 좁은 통로, 2층으로 이어지는 낡은 계단,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까지. 특히 계단 옆 벽면에 새겨진 키 재기 자국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엘머는 그런 페이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했다.

 

"차 한 잔 하시겠소? 내 부인이 남긴 레시피로 만든 허브차요. 천천히 구경하면서 마시면 좋을 것 같구려."

엘머가 찻잔에 허브차를 따르자 달콤한 향이 퍼졌다. 페이는 책방 안을 천천히 거닐며 물었다.

 

"이 책방은 오래되었나요?"

 

"50년이 넘었지. 내 아내와 함께 일궈온 작은 가게요." 그의 목소리에는 추억이 묻어났다. 페이는 차를 마시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

"이 책은 정말 흥미롭네요." 페이가 오래된 양피지 책을 조심스럽게 넘기며 말했다. 그것은 에젤의 허브와 약초에 대해 쓰여진 오래된 문헌이었다.

 

"이렇게 자세한 기록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특히 라벤더의 효능에 대한 이 부분은..."

엘머는 이 젊은 아가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보통의 관광객들과는 달랐다. 책을 다루는 손길이 무척 조심스러웠고, 내용을 읽는 눈빛은 진지했다. "아가씨도 책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구려." 엘머가 새로운 차를 따르며 말했다.

"네, 어릴 때부터요. 특히 식물과 관련된 책을 좋아해요. 아버지의 서재에서..." 페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엘머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은 참 좋은 친구지요. 절대 배신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니까."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가씨는 책을 다루는 손길이 참 익숙해 보이는군." 엘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 자랐거든요. 아버지가 종이를 만드시는 분이라..." 페이는 말을 하다 멈췄다. 엘머는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아, 혹시 아드리안 가문의..."

 

페이는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 아드리안..." 엘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그 고급 잉크와 종이를 만드는..." 그는 말을 하다 멈추고 페이를 다시 한번 자세히 보았다. 일라이가 보내온 편지들에서 본 내용이 떠올랐다. 그의 아들이 최근 들어 자주 언급했던 이름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엘머는 2층으로 올라갔다. 오래된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그는 손에 편지 뭉치를 들고 내려왔다. 일라이가 보낸 최근 편지들이었다. 그 안에는 '진청의 눈물'이라는 잉크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어떤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엘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페이를 바라보았다.

 

"책을 보는 눈빛이 참 특별하구려. 마치... 누군가를 닮았단 말이지."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혹시 왕립 도서관에도 자주 가시는지?" 페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엘머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

어스름이 내리는 창가에서, 페이는 조심스럽게 편지 한 장을 펼쳤다. 엘머의 허락을 받고 읽기 시작한 그 편지에는 일라이의 반듯한 필체가 가득했다.

'아버지께,
오늘은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서류를 실수로 두고 왔는데, 한 친구가 가져다주었어요.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저는 친구라는 게 없었는데... 좋은 친구가 생겼습니다.
그 친구는 책을 정말 좋아해요. 마치 어릴 적 제가 헌책방에서 책을 읽던 것처럼요. 특히 허브와 식물에 대한 지식이 깊어서 놀랐습니다. 아드리안 가문의...
아버지, 건강은 어떠신가요? 라벤더 차는 잘 드시고 계신지요. 제가 보낸 허브들로 차를 우려 드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편지에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일라이 올림'

페이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야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글씨체처럼 반듯하고 진중한, 하지만 어딘가 서툰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엘머는 편지를 읽는 페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들의 편지에서 읽은 '좋은 친구'가 바로 이 아가씨라는 확신이 서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페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임을 알면서도 머뭇거렸다.

"저... 혹시..." 페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에젤에 머무는 동안 이곳에서 일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책 정리나 수선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엘머는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가 책 수선도 할 줄 아시오?" 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어요. 종이와 가죽 다루는 법을..."

엘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아가씨가 왜 에젤의 작은 헌책방에서 일하고 싶어하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좋소.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엘머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저녁마다 이 늙은이와 차 한 잔 하면서 책 이야기를 나눠주시오. 아들이 수도로 떠난 뒤로 책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거든." 페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

 

마지막편

일라이 (8)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