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린든 (8) fin.

뤼튼 캐릭터챗 '일라이 린든'
create by 예리엘
edited by 베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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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끝자락, 에젤의 헌책방에는 새로운 일상이 자리 잡았다. 페이는 아침이면 라벤더 언덕을 산책하고, 오전에는 엘머를 도와 책을 수선했다. 그녀의 섬세한 손길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 일을 해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특히 가죽 장정을 다루는 솜씨는 엘머도 감탄할 정도였다.

오후가 되면 페이는 책방 구석구석에서 오래된 책들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때로는 창가의 햇살 아래서, 때로는 계단 밑 작은 공간에서.
 
엘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치 어린 시절의 일라이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책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모습이나, 책장을 넘기는 조심스러운 손길까지도.

그리고 매일 저녁, 두 사람은 해티의 레시피로 만든 허브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엘머는 차를 마시는 동안 일라이가 보내온 편지를 페이에게 보여주곤 했다. 편지들은 대부분 일라이의 일상을 담담하게 적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삐삐'라는 이름의 작은 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페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엘머는 놓치지 않았다.

"이런, 아들놈이 참..." 엘머는 편지를 읽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드리안 아가씨와 안뜰 스윙벤치에서 책을 읽었다는 부분만 세 장이나 되는구려." 페이는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평소의 과묵한 일라이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적어 보낼 줄이야.

"그리고 여기... 무도회 준비를 도와주신 아가씨 덕분에 실수 없이 잘 마쳤다고..."
 
엘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페이를 바라보았다. "춤을 가르쳐주실 때 처음에는 서툴러서 아가씨의 발을 여러 번 밟았지만, 마지막에는 완벽하게 춤을 췄다고 하는군요."
 
페이는 창 밖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무 자세히 쓰시는 거 아닌가요..."

"하하, 이런 편지는 처음이오. 늘 도서관 일과 책 이야기뿐이었는데..." 엘머는 따뜻한 눈길로 페이를 바라보았다.
 
"아들이 이렇게 누군가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니 이 아비는 참 기쁘오. 해티가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행복이 섞여 있었다. 페이는 그런 엘머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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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젤의 시장거리는 허브향이 은은하게 퍼져있었다. 페이는 엘머가 좋아할 만한 과자를 고르고 있었다. '아버님이 달달한 것을 좋아하시니까...' 그녀는 메이플 시럽이 들어간 과자를 고르다가 문득 귀에 들리는 이야기에 멈칫했다.

"야, 그 책벌레 새끼 요즘 잘나간다며?" 거칠고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페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허름한 옷차림의 한 무리가 모여 있었다. 그중 가장 뚱뚱한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 모건. 그 재수없는 놈이 잘나가고 있다더라."

"하! 어릴 때는 매일 울면서 도망다녔는데..." 페기라는 여자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 못생긴 노부부가 키운 놈 말하는 거지? 그 영악한 놈..." 그들의 말투에서 어린 시절 일라이를 괴롭혔던 기억을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뉘앙스가 묻어났다.

페이의 손에 쥐고 있던 종이봉투가 구겨졌다. 그들의 말투에서 과거의 악의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일라이가 언급했던 그 '괴롭힘'의 주역들이 분명했다. 그녀는 잠시 새로 변신해 그들의 머리 위에 '선물'을 남기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근데 그 자식, 요새는 귀족들이랑도 어울린다더라?"
 
"에이, 누가 그런 소릴... 설마."

페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일라이가 왜 에젤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페이는 고개를 들고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드리안 가문의 위엄이 그녀의 자태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무리들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눈동자에는 차가운 기품이 서려있었다.

"실례지만, 방금 일라이 린든 님의 이야기를 하신 것 같아서요."
 
페이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그들은 갑자기 등장한 고귀한 분위기의 아가씨 앞에서 말을 잃었다.
 
"모르시나 보군요. 그분은 현재 왕실의 특별 프로젝트를 맡고 계신 분이에요. 미델 백작님께서 직접 추천하셨다고..."

페이는 그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녀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요." 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일라이 린든 님은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해요. 마법 같은..."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흘렸다. "누군가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마, 마법이라뇨..." 페기와 모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페이는 그들의 반응을 즐기며 우아하게 돌아섰다. "아, 그리고..." 그녀는 어깨 너머로 말했다. "이 이야기는 절대 비밀이에요. 알죠?" 그녀의 말에는 은근한 위협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기에 바빴다.

페이는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제 진짜 재미있는 걸 보여줄게요." 그녀는 주위를 살피고 나서, 순식간에 하얀 깃털의 새로 변신했다.

"찌르륵!" (에젤의 친구들, 모여주세요!)

순식간에 주변의 새들이 모여들었다. 참새들, 비둘기들, 심지어 까마귀까지. "뺙?" (무슨 일이세요?) 페이는 깃털을 부풀리며 대답했다.

"삐이-삐이 삑!" (저기 가는 사람들, 조금 혼내주고 싶어요!)

"삐이삐삐이! (제 친구를 괴롭혔던 나쁜 사람들이에요.)"
 
새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페이를 바라보았다.

까치가 고개를 갸웃했다. "깍-?" (어떻게 할건데요?)

"찌륵 찌륵! (그들의 머리 위로 '선물'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새들이 즐거운 듯 날갯짓을 했다.

"삐-이! (그리고 그들이 입은 옷에 우리의 예술을 남기는 거예요!)" 새들은 킥킥거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페이는 새들을 이끌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모건과 페기 일행이 가는 길을 따라, 작은 새들의 군단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하얀 새와 그 뒤를 따르는 작은 새들의 무리가, 과거의 잘못에 대한 '특별한 보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하늘에서 수십 마리의 새가 날아들었다.
 
"어? 저게 뭐지?" 페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하늘에서 '선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악!"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페이는 다른 새들과 함께 날아다니며 즐거운 듯 지휘를 했다.

"삐이삐이! (친구들! 고마워요!)" 페이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새들은 즐거웠던 듯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페이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모건과 페기 일행이 "마법이다! 진짜 마법이야!" 하며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옷은 새들의 '예술 작품'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일라이 씨가 마법사라니, 정말 웃기네요." 페이는 다시 과자를 고르며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장난스러웠다.
 
일라이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그의 차가운 표정 뒤로 당황스러움이 스칠 것이다.

엘머에게 줄 과자를 사들고 헌책방으로 돌아가는 길, 페이는 하늘을 나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치 그녀에게 인사하듯 날갯짓을 했다.
 
"고마워요, 친구들." 그녀는 작게 속삭였다. 이제 에젤에서 일라이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그를 마법사로 오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나쁘지 않은 오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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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오늘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페이는 과자를 건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일라이 씨를 괴롭혔던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녀는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했다. 엘머는 처음에는 흐뭇하게 웃었지만, 곧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이거." 엘머는 오늘 도착한 일라이의 편지를 건넸다. 페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편지를 펼쳤다. 일라이의 반듯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왕실 계보도 복원 프로젝트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100년 전 끊어진 왕비 가문의 혈통을 증명할 수 있는 고문서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조안과 함께 왕립도서관의 모든 서고를 뒤져보았지만... 라벤더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프로젝트가 실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페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엘머는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가씨... 혹시 라벤더 가문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요?"
 
일라이의 편지를 읽는 페이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보렐 남작가와 혼인한 로즈라는 여성의 기록을 찾았습니다. 100여 년 전 수도의 귀족으로 살았다고 하는데, 그녀가 라벤더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조안과 함께 모든 귀족가의 혼인 기록을 뒤져보았지만, 그녀의 출신을 증명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어요. 아버지, 혹시 에젤의 오래된 문서들 사이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요?'

페이는 편지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렇게 또 일라이 모르게 그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녀는 엘머를 힐끗 바라보았다.
 
엘머는 그런 그녀의 망설임을 이해한다는 듯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마음을 전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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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부터 페이는 헌책방의 먼지 쌓인 책들 사이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더 이상은 일라이 몰래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높은 책장을 올려다보았다. 창가에 앉은 참새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이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높은 곳의 책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때 얇은 책자 하나가 균형을 잃고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야!" 그녀가 책을 주워들자 '에젤의 일상'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먼지를 털어내며 책을 펼치자 100년 전 에젤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라벤더 밭의 수확량, 마을 축제 기록, 주민들의 결혼과 출생 소식... 그리고 그 사이에서 페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내용이 있었다.
 
'로즈의 라벤더 오일은 여전히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다. 그녀의 비법이 담긴 오일은 아드리안 가문에서도 인정받아...'

페이는 떨리는 손으로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책장 사이에서 로즈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 펼쳐졌다.
 
'그녀의 정성 들인 오일은 아드리안 가문에서도 인정받아 매년 정기적으로 거래하고 있다. 특히 잉크 제조에 사용되는 특별한 등급의 오일은 아드리안 가문만을 위해 따로 준비한다고 한다.'

다음 페이지에는 로즈의 결혼 소식이 적혀 있었다.
 
'오늘 로즈가 수도에서 온 귀족 남성과 결혼했다. 보렐 남작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이제 수도로 떠난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아쉬워했지만, 로즈는 환하게 웃으며 떠났다.'

페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창가의 참새들도 그녀의 흥분된 기색을 눈치챘는지 가까이 날아와 앉았다. 아드리안 가문과 거래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그녀의 가문에는 분명 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다. 특별 등급의 오일... 그리고 그것을 이용한 특별한 잉크...

"이제 알겠어, 우리 저택에서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참새들이 그녀의 말에 화답하듯 날개짓을 했다. 페이는 일라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방법으로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페이는 찾은 책을 엘머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아버님... 이걸 일라이 씨에게..."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아직도 직접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 엘머는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아가씨, 일라이의 편지를 끝까지 읽어보지 않았구먼." 엘머는 편지를 다시 건넸다. 페이가 떨리는 손으로 뒷장을 펼쳤다. 일라이의 반듯한 글씨체가 이어졌다.

'아버지, 제가 돌보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있습니다. 삐삐라고 이름 지어주었어요. 그 아이가 창가에 앉아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삐삐가 보이지 않아 걱정입니다. 그리고... 아드리안 아가씨도 마찬가지예요. 그녀와 함께 있으면 마치 어릴 적 헌책방에서 보냈던 그 평화로운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하지만 요즘은 통 보이지 않네요. 그녀가 하려던 마지막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했는데...'

페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라이의 글에서 묻어나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창가에 앉은 참새들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진심을 숨기는 건 결국 서로를 아프게 하는 일이지." 엘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라이도 그렇고, 아가씨도 그렇고... 둘 다 너무 많은 것을 혼자 안고 있는 것 같구려."

페이는 책을 가슴에 꼭 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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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행 마차 안에서 페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어지는 에젤의 풍경 속에서 라벤더 언덕이 보였다.
 
한참을 헤매던 마음이, 이제야 선명해졌다. 일라이의 서재에서 보냈던 시간들, 그의 옆에서 새가 되어 지켜봤던 순간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삐삐'라고 부를 때마다 느꼈던 설렘까지.

'당신의 곁에서 새가 되어 날아다녔어요. 당신이 지어준 이름으로 불리며 행복했죠.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닌 다른 모습이었어요.'

예쁘게 말려 놓은 꽃잎처럼 조심스레 간직했던 마음이, 이제는 붉게 물들어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꽃처럼 피어난 마음과 함께, 아픔도 함께 자라났다.
 
스스로 선을 그었던 나날들. 수인과 사람 사이의 선, 귀족과 평민 사이의 선, 거짓말과 진실 사이의 선... 그 모든 선 위에 그녀의 작은 소망들이 맺혔다. 닿을 수 없는 그를 바라보며 그저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순간들...

페이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그저 '안녕'이란 말 한마디에도 담아내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기에. 일라이를 마주하면 들뜬 마음에 모든 것을 고백해버릴까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숨길 수 없는 그 마음을 꾹 눌러 담으며 페이는 가슴에 안고 있던 책을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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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 갑자기 무슨 일인거냐?" 아드리안 백작이 놀란 눈으로 문서고로 달려가는 딸을 바라보았다. 평소 한가롭고 자유로운 영혼인 페이가 이렇게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여보, 우리 딸이 드디어..." 백작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팔을 잡았다. "그래요, 드디어 우리 페이가 무언가에 진심으로 열중하는 모습을 보네요."

"어머니! 아버지! 혹시 100년 전 거래 문서들이 어디 있을까요?" 페이가 문서고에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특별 등급 잉크 제조용으로 쓰였던 거요!"

"그런 오래된 문서를..." 백작부인이 말하다 멈췄다. "아, 그래. 지하 문서고에 있을 거야. 거기엔 오래된 문서들을 보관하니까."

백작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교환했다. 그들의 딸이 이토록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묻지 않기로 했다. 페이가 스스로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하 문서고의 먼지 쌓인 책장 사이에서 페이는 열심히 문서들을 뒤적였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두꺼운 가죽 장정의 문서철을 발견했을 때,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야... 이걸로 일라이를 도울 수 있어!'

"어머니, 아버지! 저 먼저 가볼게요!" 페이는 책을 품에 안은 채 서둘러 문서고를 빠져나갔다. 그녀의 붉은 곱슬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백작 부부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여보, 페이에게 온 편지들을 전해주지 못했네요." 백작부인이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왕립도서관에서 온 편지도 있었는데..."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렇게 열정적인 모습은 오랜만이네요. 마치 어릴 적 처음 날개를 펼쳤을 때처럼..." 백작부인의 말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딸이 무언가에 이토록 진심인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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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안 가문의 오래된 문서들 사이에서 페이가 발견한 것은 예상과는 다른 진실이었다.
 
100년 전, 라벤더 오일을 거래했던 상대는 '라벤더' 가문이 아닌 '베버리' 가문이었다. 페이의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상세한 기록에는 놀라운 사실이 적혀 있었다. 베버리 가문의 후계자인 '로즈' 영애가 직접 사업 관리를 배우기 위해 방문했다는 것이었다.

페이는 떨리는 손으로 거래 명세서를 살펴보았다. 그곳에 찍힌 로즈의 인장은, 헌책방에서 발견한 '에젤의 일상' 속 그 인장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로즈 라벤더는 원래 베버리 가문의 영애였던 것이다. 그녀가 에젤에서 라벤더 오일을 만들었던 것은, 베버리 가문의 전통적인 사업 수완을 익히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발견은 마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은 것과 같았다. 페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일라이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은 것이다.
 
로즈가 보렐 남작과 결혼하기 전, 그녀는 베버리 가문의 당당한 영애였다. 이것으로 라벤더 가문의 귀족 혈통이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페이는 문서들을 조심스럽게 모았다. 이제 그녀는 일라이에게 직접 이 진실을 전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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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도서관의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알라릭 왕은 복원 전문가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왕비의 혈통을 증명하는 일은 단순히 계보도를 완성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엔슬린 왕국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일라이는 자신의 자료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렐 남작과 왕비의 증조모인 로즈의 혼인 기록은 찾았지만, 정작 로즈가 귀족 출신이라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어깨가 무겁게 처져있었다.

"폐하! 제가 찾은 자료에 따르면..." 조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왕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곧 사브리나의 날카로운 눈빛에 막혔다.
 
"조안, 지금은 때가 아니야." 사브리나가 조용히 타일렀지만, 조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떠들어댔다. "하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조안 경." 알라릭 왕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렸다.
 
"지금은 모두가 신중하게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구나." 왕의 말에 조안은 마치 얼음이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고, 일라이는 자신의 자료들을 조용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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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회의장의 열린 문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들었고, 그 빛 속에서 붉은 곱슬머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일라이의 시선이 그곳에 멈췄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페이는 우아하게 한 발자국씩 내딛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회의장을 천천히 훑더니, 마침내 일라이와 마주쳤다. 
 
그 순간, 일라이의 가슴 한켠이 따뜻하게 울렸다. 마치 그날, 왕궁 무도회장에서 처음 그녀를 봤을 때처럼. 그때도 이렇게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가죽 문서철이 들려있었다. 회의장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지만, 페이의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입가에 맴도는 희미한 미소가 일라이의 시선을 붙잡았다.

"폐하," 페이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회의장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맑게 울렸다. 일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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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페이의 손이 원탁에 책을 내려놓는 순간, 그의 손이 저절로 움직여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감정들이 그를 압도했다.
 
그동안 그가 느꼈던 그리움, 실망, 혼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설렘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페이 아가씨..." 일라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회의장의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페이로 가득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동안 제가... 아니..." 평소의 차분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페이가 당황한 듯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일라이는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조안이 헛기침을 하고, 사브리나가 미소를 감추려 입술을 깨물었다. 알라릭 왕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땐 왜 아무 말도 없이..." 일라이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한 채 공중에 흩어졌다 푸른 눈동자가 페이의 검은 눈동자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페이의 손을 더욱 따뜻하게 감쌌다.

"이제는... 이제는 아가씨가 또 사라질까 봐..." 일라이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그의 말에는 그동안 쌓아두었던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페이의 뺨이 붉게 물들었고, 그녀의 곱슬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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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릭 왕의 의미심장한 헛기침 소리에 일라이는 마침내 상황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회의장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지만, 그럼에도 페이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폐, 폐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일라이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침착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사브리나가 문을 열어주자, 일라이는 페이의 손을 여전히 잡은 채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회의장에서는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거 좋은 소문거리가 생겼는걸?" 조안이 히죽거리며 말하자 사브리나가 그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아야! 사브리나, 그게 아니라..." 조안의 항변이 이어졌다.

알라릭 왕은 페이가 남겨둔 문서들을 천천히 펼쳤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것 봐... 베버리 가문의 로즈... 이것이 우리가 찾던 연결고리였군." 왕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는 살짝 열린 문 쪽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들에게 잠시 시간을 주는 게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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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도서관의 안뜰에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일라이는 여전히 페이의 손을 잡은 채, 시선을 땅에 고정한 채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때도 이렇게 작고 따뜻했다.

'왜 그땐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거죠? 왜 거짓말을 했나요? 제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나요?' 수많은 질문이 그의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페이의 손등을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다시 사라질까 봐 두려운 것처럼.

'당신이 다시 돌아와서 기뻐요.' 이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책에서 읽은 수많은 문장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것 하나 지금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것이 없었다.

이런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페이가 곁에 있을 때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녀가 사라졌을 때는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페이의 붉은 곱슬머리로 향했다. 가을 햇살에 비친 그녀의 머리카락이 마치 살아있는 불꽃처럼 반짝였다.
'이 순간이 꿈이 아니길.' 일라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시간 동안 그가 얼마나 자주 그녀를 꿈꾸었는지,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이며 보냈는지 그녀는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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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그동안..."

페이의 작은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손이 일라이의 손 안에서 살짝 움직였다.
 
"거짓말을 한 건... 그때 제가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였어요. 하지만 그보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일라이 씨의 곁에 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됐죠."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일라이의 푸른 눈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제가... 제가 떠난 건 제 잘못이에요. 일라이 씨는 항상 진실했는데... 저를 미워할까 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그녀의 손가락이 일라이의 손을 살짝 꽉 쥐었다.
 
"이제는 모든 걸 바로잡고 싶어요. 그동안 일라이 씨를 속인 것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것도... 전부 사과하고 싶어요." 페이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리고... 그리고 이번엔 진실된 모습으로 일라이 씨의 곁에 있고 싶어요."

"그리웠어요, 도서관에서 함께 보낸 시간들이..." 페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책장 사이에서 마주친 순간들, 일라이 씨가 책을 정리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시간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함께 책을 읽던 그 오후들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페이를 일라이는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서 페이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이야기들을, 그녀가 먼저 꺼내주고 있었다.

"알아요." 일라이가 작게 속삭였다.
 
그의 품 안에서 페이의 온기가 전해졌다. 가을바람이 두 사람 주위를 맴돌았고, 도서관 안뜰의 나무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이 순간, 그들 사이에 놓여있던 모든 거리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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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를 안은 순간, 그들 주위로 부드러운 빛이 피어올랐다. 하얀 깃털이 공중에서 춤추듯 휘날렸다.
 
그 빛나는 순간, 페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 일라이의 손바닥 위에는 작고 하얀 새가 앉아 있었다. 그동안 그가 '삐삐'라고 불렀던 그 새였다.

일라이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놀라움보다는 이해와 애정이 가득했다.
 
그가 왜 그토록 이 작은 새에게 끌렸는지, 왜 페이의 눈빛이 그토록 친숙하게 느껴졌는지. 그의 엄지가 조심스럽게 새의 부드러운 뺨을 쓰다듬었다. 작은 새는 그의 손바닥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일라이는 천천히 몸을 숙여 새의 작은 머리에 입술을 살짝 댔다.
 
다시 한번 부드러운 빛이 그들을 감쌌다. 서늘한 가을바람 속에서도, 그들 사이에는 봄날같은 온기가 감돌았다. 일렁이는 빛에 감싸이며 페이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일라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일라이는 페이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고,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도서관 안뜰에 떨어지는 단풍잎들 사이로 하얀 깃털이 춤추듯 날아올랐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순간의 완성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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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동안..."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 "보고 싶었어요..." 일라이의 손이 페이의 붉은 곱슬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이 없으니까..." 또 다른 입맞춤. "항상 허전했어요..."

페이의 손이 일라이의 셔츠를 살짝 움켜쥐었다. "저도요..." 짧은 입맞춤.
 
"매일..." 다시 한번의 달콤한 입맞춤. "일라이 씨를 생각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숨을 고르던 그들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횡설수설하는 고백이었지만, 그 어떤 시인의 시구보다 아름다웠다.
 
"이제는..."
 
"도망가지 마세요..."
 
페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반짝였다. "네... 약속할게요..."
 
그들의 입술이 다시 한번 포개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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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안뜰에서 회의실로 돌아오는 길, 일라이와 페이는 서로의 손을 잡은 채였다. 복도를 걸으며 간간이 서로를 훔쳐보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둘 다 붉어진 얼굴을 살짝 돌리곤 했다.

알라릭 왕은 이미 책상 위에 놓인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은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오호, 드디어 돌아왔군."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책을 덮었다. "소실되었던 라벤더 가문의 혈통이 증명되었어. 정말 훌륭한 발견이야."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그런데..." 왕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일라이와 페이를 번갈아 보았다. "우리 젊은 사서가 이렇게 붉어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아가씨와 함께 있다 보니 봄날이 된 것 같나?"

일라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전하..."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려 했지만, 알라릭 왕은 이미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아, 젊어서 참 좋구나. 사랑이란 건 말이야..." 왕의 농담에 페이도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전하, 계보 문서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일라이가 황급히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왕은 여전히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그래그래, 아주 훌륭해. 하지만 난 지금 우리 도서관의 새로운 '로맨스' 챕터가 더 궁금한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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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전하."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단했다. "제가 아드리안 가문의 딸이라는 것은 우연일 뿐이에요. 제가 일라이 씨를 사랑하는 건, 그가 가진 마음 때문이에요."

그녀는 일라이의 손을 꼭 잡았다.
 
"저는... 일라이 씨가 책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사랑에 빠졌어요. 그가 어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 오래된 책들을 정성스레 다루는 손길...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지식을 나누어주려 하는 그의 마음을..."

알라릭 왕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일라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귀족들의 은근한 차별과 멸시를 견뎌왔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페이의 말은 마치 오랫동안 그의 가슴 한켠을 짓누르고 있던 무게를 들어올리는 것 같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깊은 감동이 어렸다.

"그래..." 알라릭 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구나, 영애. 진정한 가치는 혈통이 아닌 마음에 있는 법이지."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 "일라이." 왕이 일라이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군."

알라릭 왕은 천천히 책상 위의 문서들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혈통은..." 그가 말을 이었다.
 
"때로는 우리를 속박하는 쇠사슬이 되기도 하지. 하지만 오늘, 영애가 가져온 이 문서들은 그 쇠사슬을 끊을 수 있는 열쇠가 될 수도 있겠구나."

왕의 시선이 일라이와 페이의 맞잡은 손에 머물렀다. 귀족가의 영애와 평민 출신 사서의 손. 그 작은 접점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계보도는 완성되어야 하겠지만... 이제 그 의미는 달라질 거야. 누군가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닌,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로 말이야."

일라이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페이의 손이 그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그들의 맞잡은 손은 마치 오랜 신분제도의 장벽을 허무는 첫 번째 돌멩이 같았다. 작지만 의미있는 시작이었다.

"앞으로도..." 알라릭 왕이 말했다. "이런 용기있는 사랑이 더 많이 피어나길 바라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어린 축복이 담겨 있었다.

회의실의 공기가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일라이와 페이에게 향해 있었지만, 그것은 불편한 시선이 아닌 따뜻한 축복과도 같았다. 조안이 분위기에 편승해 슬그머니 사브리나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그녀의 손등에 손을 얹으려 했다.

"조안." 사브리나가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단호하게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의 귓불이 살짝 붉어진 것을 놓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조안은 허탈한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듯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자, 이제 돌아가 봐도 좋겠구나." 알라릭 왕이 일라이와 페이를 향해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 일라이는 페이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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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린든 하우스의 창문으로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일라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의 금발이 베개 위에 부드럽게 흩어져 있었다.

콕콕!
 
작은 새가 그의 이마를 쪼았다. 일라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음..." 그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순간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페이가 나타났다.
 
"일라이 씨, 일어나세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그의 양 볼을 꼬집었다.

"으으..." 일라이가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았다. "앗! 8시 30분?!" 그가 벌떡 일어났다.
 
"페이, 왜 더 일찍 깨우지 않았어요?"
 
페이는 키득거리며 그의 허둥대는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일라이 씨가 너무 귀여워서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일라이는 서둘러 셔츠를 입으려 했지만,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었다.

"자, 이리 와요." 페이가 다정하게 그의 앞에 서서 단추를 다시 채워주었다. 일라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침 햇살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창문에 비쳤다.

도서관에 도착한 일라이는 다행히 9시 정각을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사브리나가 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린든 군, 어제 늦게 잤나 봐요? 평소엔 8시 반에는 와서 책 정리하던데..."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 그게..." 일라이가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책을... 책을 읽다가..." 그는 자신의 변명이 얼마나 어설프게 들리는지 깨닫고는 말끝을 흐렸다. 그때 조안이 슬쩍 끼어들었다.
 
"책을 읽다가 늦잠이라... 아침에 누가 안깨워줬어?" 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일라이의 귓불이 붉어졌다.

도서관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책을 정리하고, 방문객들을 안내하고, 대출 기록을 정리하는 일상적인 업무.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정오가 되면 어김없이 붉은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아가씨가 작은 도시락을 들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라이 씨, 오늘은 호박 수프예요." 페이의 목소리에 일라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브리나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조용하고 까칠했던 일라이가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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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뒤뜰의 벤치에서 점심을 먹으며, 페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벨레카 영애와는... 잘 정리되었나요?"
 
일라이는 호박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벨레카 영애는... 나를 귀족 사회에 맞추려 했어요." 일라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내가 귀족들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했죠. 하지만..." 그는 페이를 바라보았다. "난 그저 책을 사랑하는 사서로 살고 싶을 뿐이에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했던 그 작은 헌책방처럼, 누구나 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어요."

"벨레카 영애, 당신의 마음은 진심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저는 변할 수 없어요. 저는 그저 제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벨레카는 잠시 침묵하다가 미소지었다. "알아요. 당신이 그래서 더 특별한 거예요. 하지만 그게 당신을 더 아프게 할까 봐 걱정됐나 봐요."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며 작별했다.

"그래서..." 일라이가 페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델 가문의 제안도 정중히 거절했어요. 난 그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그의 손이 페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도서관 뒤뜰에 떨어지는 햇살이 그들의 모습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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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슬린 왕국은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알라릭 왕은 평민들에게도 자신들의 뿌리를 기록할 것을 권장했고, 이는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왔다.
 
평민들은 자신들의 가계도를 정리하면서, 그들도 귀족 못지않은 자부심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왕립도서관에는 이제 자신의 가계도를 찾으러 오는 평민들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일라이는 그들을 도우며 미소 지었다.
 
때로는 오래된 교회의 세례 기록이나, 마을의 토지대장에서 흥미로운 발견을 하기도 했다. 어떤 평민 가문은 수 세대에 걸쳐 대장장이 기술을 전수해왔고, 또 어떤 가문은 대대로 약초 재배의 비법을 전해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도 우리만의 역사가 있구나..." 한 노인이 자신의 가계도를 보며 감격스러워했다.
 
일라이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혈통이나 신분보다 더 중요한 건, 각자의 삶이 만들어낸 이야기구나.'
 
그의 곁에서 페이가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그들의 사랑이 그러했듯, 진정한 가치는 겉모습이 아닌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깊어가는 밤, 일라이는 서재에서 가계도를 그리고 있었다. 짙푸른 잉크가 종이 위에서 우아한 선을 그리며 흘러갔다. 그의 손끝이 잠시 멈칫했다.
 
누군가의 부모님 이름을 적으며, 문득 자신의 뿌리에 대해 생각했다. 엘머와 해티... 그들은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는 부모님이었지만, 그 이전은...
 
모두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때, 유독 그만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왔다.

페이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일라이 씨..." 그녀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일라이 씨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어요. 그건 혈연보다 더 깊은 인연이에요."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쓸쓸함이 맴돌았다.

"가끔은... 궁금해요." 일라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하지만 동시에 두려워요. 알게 되면, 지금의 이 행복이 흔들릴까 봐." 페이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일라이 씨는 일라이 씨예요. 그게 전부예요." 그녀의 말에 일라이가 미소지었다.
 
페이가 잉크병을 집어들었다. "일라이 씨, 이 잉크는 특별해요."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버지와 제가 함께 만든 거예요. 아직 세상에 내놓지 않은..." 그녀는 잉크병을 빛에 비춰보았다.
 
"진청의 눈물보다 더 깊은 남색이면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요."

일라이는 잉크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름은 뭐라고 지으셨나요?"
 
페이가 살짝 미소지었다. "린든이요."
 
일라이의 눈이 커졌다. "린든...?"
 
"네. 로즈 베버리가 자신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라벤더란 이름을 선택했듯이... 저희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잖아요."

"이 잉크로 쓰여질 이야기들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미래예요."
 
페이의 말에 일라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성씨 '린든'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엘머와 해티가 그에게 준 새로운 시작이었고, 이제는 페이가 그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있었다. "우리의 뿌리는..." 페이가 일라이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거예요. 과거가 아닌, 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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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헌책방의 난로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따스한 온기를 퍼뜨렸다. 엘머는 허브티를 따르며 옛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티는 말이다, 처음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대. 괴팍하고 까칠한 책벌레라고..." 그가 허허 웃었다.
 
"근데 내가 매일 찻집에 가서 그녀가 만든 허브티를 마시고, 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버지도 찻집에 다니셨어요?" 일라이가 놀란 듯 물었다.
 
"그럼, 난 그때 에젤에서 제일 유명한 바람둥이였지." 엘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해티는 그런 나를 보며 '책이나 읽는 괴짜'라고 했었는데... 어느 날 내가 그녀의 찻집에서 라벤더 언덕 이야기가 나오는 책을 읽어주었더니, 그 다음날부터 날 찾아와 책 읽어달라고 조르더라고."

엘머는 일라이와 페이를 번갈아 보며 미소지었다.
 
"너희 둘을 보니 옛날 생각나는구나. 해티도 처음엔 저렇게 수줍어했었지." 그가 찻잔을 들며 추억에 잠겼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해티가 갑자기 나를 라벤더 언덕으로 끌고 가더니 '당신이랑 평생 책 읽으며 살고 싶어요'라고 하는 거야. 그때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
 
엘머의 이야기에 페이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일라이를 바라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도 꽤나 파격적이었던 것 같아. 귀족들이 드나드는 찻집 주인과 가난한 책방 주인이라니."

일라이는 페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엘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해티는 책방에서 허브티를 팔자고 했었지..."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해티가 없었다면 난 그저 고리타분한 책방 주인으로 늙어갔을 거야. 그녀는 내 인생에 향기를 가져다준 사람이었지."
 
페이는 일라이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녀도 일라이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책방 창 밖으로 저녁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이 순간만큼은 영원히 기억될 것 같았다.
 
엘머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는 아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며, 해티도 어딘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 믿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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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로그를 완결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일라이는 대화 내내 너무나 즐거웠고 똑똑한 캐릭이라는 것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자유설정으로 수인 설정만 가져갈 수 있으니 꼭 플레이 해보시길! 추천!

 

일라이 행복해라.. 페이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일라이의 저 시종일관 정중한 말투가 너무 좋다...

후일담이 곧 올라옵니다 💌

 

 
 

 

근데 아직 결혼 안했다고 각 방 주는거 웃기다. 나는 에젤에서 둘이 껴안고 잘줄 ㅋㅋㅋㅋㅋ

 
 
 
 
대화하러가기! 뤼튼 캐릭터챗 '일라이린든' @예리엘

일라이 린든 | 뤼튼 캐릭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