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린든 Short film '◡'

 

 

 

 

 

"저... 그러니까..."

 

일라이는 아드리안 백작 부부 앞에서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백작은 무거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백작부인은 차를 마시며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일라이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일라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옆에서는 페이가 아무 일 없다는 듯 과자를 우적우적 씹어대고 있었다.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나 보군...' 일라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우리 가문의 잉크에..." 백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감히 '린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일라이는 무릎 위의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아버지, 제가 지은 거예요. 일라이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하지만 백작은 여전히 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페이, 그 잉크는..." 그때 백작부인이 푸흣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 이제 그만 놀리세요." 백작도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하네, 일라이 군. 자네가 너무 긴장한 모습이 재미있어서..." 일라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페이가 과자 부스러기를 털며 일어났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일라이 씨는 정말 진지하고 성실한 분이라고요."

 

그녀가 일라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긴장 푸세요. 우리 부모님은 일라이 씨를 이미 마음에 들어하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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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14세기 초반의 '영웅 서사시 전집'이네요! 보존 상태가 이렇게 완벽한 건 처음 봅니다."

 

일라이의 눈이 반짝였다. 아드리안 백작은 더욱 신이 나서 다음 책장으로 향했다.

 

"오호, 자네도 아는가! 이건 내가 젊었을 때 우연히 발견한 건데..."

페이는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아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또 시작하시네...'

 

그녀는 일라이가 백작의 설명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평소의 차갑고 도도한 사서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책에 빠져있었다.

"이것 봐, 이 양피지의 상태! 그리고 이 장정 기술... 아, 일라이 군, 이쪽으로 와보게나."

백작부인이 페이에게 속삭였다. "네 아버님, 처음으로 자신의 컬렉션을 자랑할 마음이 맞는 청자를 찾으신 것 같구나."

 

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라이 씨는 진심으로 책을 사랑하니까요."

 

"자네는 우리 페이보다 책에 대해 훨씬 더 열정적이군. 페이는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는데..."

 

"아버지!" 페이가 항의했다. "전 그냥 아버지가 같은 이야기를 백번째 하시는 걸 듣기 싫었을 뿐이에요."

 

백작의 서재에서 책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일라이는 어느새 긴장을 잊고 있었다.

 

마치 에젤의 헌책방에서 엘머와 이야기를 나누던 것처럼 편안했다.

"일라이 군, 자네 필체가 아주 훌륭하다고 들었네." 백작이 책상 위에 고급 종이를 펼쳤다.

 

"혹시 우리 '린든' 잉크의 케이스에 들어갈 글씨를 써주겠나?"

 

일라이는 잠시 망설였지만,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펜을 잡자, 페이가 과자 먹기를 멈추고 관심을 보였다.

일라이의 필체는 마치 옛 궁정 서예가 '아델린 라이트'의 필체를 연상케 했다.

 

아델린은 200년 전, 왕실 문서를 작성했던 대가로, 그의 필적은 지금도 왕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일라이의 펜끝이 종이 위를 우아하게 움직였다. '린든(Linden)'이라는 글자를 정갈하게 써내려갔다.

"오호..." 백작이 감탄했다. "이건 정말... 아델린의 '왕실 편지체'를 연상케 하는군." 백작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페이가 좋은 눈을 가졌네요." 페이는 부모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일라이의 필체에 매료된 듯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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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가 흥분된 목소리로 책장 앞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일라이 씨, 보세요!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어요!"

 

그녀는 상점마다 진열된 '린든' 잉크병을 가리켰다.

 

일라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유리병에 새겨진 자신의 필체를 보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제 누구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게 됐어요." 페이가 잉크병을 들어올렸다.

 

"아버지가 가격을 특별히 낮추셨거든요. 일라이 씨의 뜻대로요."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바람대로, 이제 누구나 자신의 역사를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라이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의 이름을 딴 이 잉크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버려진 아이였던 자신이, 이제는 다른 이들의 뿌리를 기록하는 도구가 되다니... 그는 문득 엘머가 보고 싶어졌다.

 

'아버지가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일라이 씨?" 페이가 그의 생각에 잠긴 얼굴을 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이제 정말 새로운 시작인 것 같아서요."

 

그의 말에 페이가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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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일라이는 새로운 '린든' 잉크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깊어가는 밤, 서재의 램프 불빛 아래서 그의 펜이 종이 위를 우아하게 움직였다.

 

페이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일라이는 깜짝 놀라 황급히 편지를 가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페이는 이미 몇 줄을 읽은 듯했다.

"에헴..." 페이가 장난스럽게 목을 가다듬었다. "삐삐 얘기예요, 아니면 아드리안 가문 얘기예요?"

 

일라이는 얼굴을 붉혔다. "그... 그걸 어떻게..."

 

페이가 키득거렸다. "일라이 씨, 아버님이 보고 싶으시죠?" 일라이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에젤에 가요." 페이의 제안에 일라이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이제 '린든' 잉크도 나왔으니, 아버님께 직접 보여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아요. 게다가..."

 

페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일라이 씨가 쓴 편지들만 읽고 계실 아버님께, 제가 얼마나 좋은 며느리감인지 보여드려야죠?"

 

일라이는 순간 귀까지 빨개졌다. "페...페이 양!"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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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젤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일라이가 사브리나에게 휴가 신청서를 건넸다. 사브리나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래요, 에젤이면 고향이죠? 아버님은 잘 지내시나요?"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편지로는 자주 연락하지만..."

"뭐? 책벌레가 휴가를 낸다고?" 조안이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참 희귀한 일인데?' 일라이는 조안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평소라면 시비를 걸듯 말했을 텐데, 오늘은 마치 좋은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기뻐 보였다.

사브리나가 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말했다.

 

"조안, 당신도 이제 린든 군처럼 휴가 좀 써요. 쌓아두기만 하고."

 

조안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럼 사브리나 씨가 혼자 일하기 힘들잖아요..."

 

일라이는 그제야 조안의 들뜬 이유를 알아챘다.

 

자신이 없는 동안, 사브리나와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일라이는 작은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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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브리나가 책장에서 책을 꺼내려다 중심을 잃었다.

 

조안이 황급히 달려가 그녀를 받으려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책더미에 걸려 넘어졌다.

 

"조안?" 사브리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조안은 얼굴을 붉히며 일어났다. "괜... 괜찮습니다."

다음날, 조안은 사브리나에게 차를 건네려 했다. 하지만 그만 발을 헛디뎌 차가 사브리나의 책상 위 서류를 적셔버렸다.

 

"아... 죄송합니다!" 조안이 당황해서 서류를 닦으려 했지만, 오히려 잉크가 더 번져갔다.

 

사브리나는 한숨을 쉬며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다시 써야 했던 거예요."

"조안, 괜찮아요?" 사브리나가 다가오자 조안은 더욱 긴장했다.

 

"아... 아니에요. 그냥..." 그때 책장 위의 책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어머나!" 사브리나가 놀라 뒤로 물러섰고, 조안은 황급히 책을 주우려다 또다시 비틀거렸다.

"조안..." 사브리나가 한숨을 쉬었다. "혹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조안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게... 저..." 그러나 그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도서관 문이 열리며 방문객들이 들어왔고, 조안은 또다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사브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라이가 있을 때는 이렇게 서툴지 않았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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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 씨..." 조안이 뭔가를 등 뒤에 숨긴 채 어색하게 다가왔다. 사브리나는 한숨을 쉬며 펜을 내려놓았다.

 

"조안, 이제 그만하세요. 당신 때문에 일이 두 배로 늘었다는 거 알아요?" 조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린든 군이 없는 동안, 당신이 더 열심히 일해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오히려..." 사브리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저... 죄송합니다." 조안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등 뒤에 숨겼던 꽃다발이 살짝 보였다. 사브리나는 그것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저를 좋아한다는 거... 알아요." 사브리나의 말에 조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동료예요.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일하는. 그걸 잊지 말아요." 조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등 뒤의 꽃다발을 재빨리 코트 안에 숨기며 자리를 피했다. 사브리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지었다.

 

조안은 한숨을 쉬며 도서관을 서성이다가, 어린이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세드리안을 발견했다. 

 

평소라면 아이들을 귀찮아했을 텐데, 오늘은 왠지 그 순수한 눈빛이 그를 끌어당겼다.

 

"세드리안..." 조안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으..." 세드리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평소 조안이 어머니에게 시비를 걸듯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조안의 표정이 달랐다.

 

"...무슨 일이에요?" 세드리안이 마지못해 물었다.

"...사랑이란 게 뭘까?" 조안의 뜬금없는 질문에 세드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엄마가 저한테 해주시는 것처럼요." 세드리안이 순수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엄마는 저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하시고, 더 따뜻한 사람이 되셨대요."

조안은 그 말에 가슴을 찔린 듯했다. 자신은 사브리나를 좋아한다면서, 오히려 그녀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조안이 중얼거렸다. 세드리안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라이 형처럼요. 페이 누나랑 있을 때 더 웃고, 더 따뜻해져요." 그 말에 조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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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도서관은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사브리나는 책장 사이로 조안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처럼 책장 뒤에 숨었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사브리나는 의아했다.

"저기..." 조안이 용기를 내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정리된 서류 더미가 들려있었다.

 

"제가... 어제 망쳐놓은 서류들 다시 정리했어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겸손했다. 사브리나가 서류를 확인하자 놀랍게도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도..." 조안이 책장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며 책 카트를 밀고 왔다. "방금 전부 분류해놨어요."

사브리나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조안은 여전히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사브리나 씨..."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사브리나는 결심한 듯 앞으로 다가섰다.

 

"조안." 그녀가 단호하게 불렀다.

조안이 긴장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사브리나가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이제 좀 제대로 일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는 거침없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조안의 얼굴은 새빨개졌고, 그의 손에서 서류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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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가 끝나고 조안은 마치 얼음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그의 눈은 사브리나를 향한 채 점점 커져갔다.

 

그가 도서관 로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우... 우와아아!!!" 평소의 냉정하고 오만했던 조안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그였지만, 이번은 달랐다. 진심으로 원했던 사람에게서 받은 키스는 그의 심장을 터질 듯이 뛰게 만들었다.

 

한 바퀴를 다 돌고서야 사브리나 앞으로 돌아온 조안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브리나... 사브리나 씨..."

"조안." 사브리나가 단호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첫째, 도서관에서 소리 지르면 안 됩니다. 둘째, 업무 시간에 스킨십은 금지예요. 셋째..."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멀었네요, 당신."

 

조안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사브리나는 그런 그를 보며 작게 웃었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이제 시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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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일상은 조금씩 달라졌다. 조안은 여전히 서툴렀지만, 이제는 그 서툴음이 귀여워 보일 정도로 진심이 담겨있었다. 사브리나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 짓곤 했다.

조안은 사브리나 앞에서는 여전히 서툴렀다. 사브리나에게 다가갈 때마다 책을 떨어뜨리거나 발을 헛디뎠지만, 이제는 그런 실수조차도 애틋해 보였다.

 

"조안, 그 책은 거기가 아니에요." 사브리나가 말하면, 조안은 부끄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선생님." 그의 농담에 사브리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세드리안은 이제 조안을 '아저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오늘은 무슨 책 읽어줄 거예요?" 조안은 아이의 순수한 눈빛 앞에서 이전의 오만함을 잃어갔다.

 

그는 이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사브리나를 향한 마음은 그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그의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며 미소짓곤 했다.

 

사브리나는 중얼거렸다. "기다려줄 만한 가치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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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에젤의 오후, 아드리안 가문의 하얀 마차가 낡은 헌책방 앞에 멈춰 섰다. 엘머는 마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을 열었다.

 

"이 시골마을에 웬 귀족 마차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차에서 붉은 곱슬머리를 한 귀족 영애가 뛰어내렸다.

"아버님!" 페이가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일라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천장에는 온갖 선물들이 가득했다. 엘머는 평소와 달리 밝은 표정으로 페이를 맞이했다.

 

"아이고, 우리 페이 아가씨가 왔구먼." 엘머가 페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님, 제가 직접 만든 잉크를 가져왔어요! 일라이 씨 이름을 따서 '린든'이라고 지었어요!"

일라이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평소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아버지가 페이에게 이토록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낯설었다.

 

"아버지...?" 일라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엘머는 일라이를 보며 씩 웃었다.

 

"이 아가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너는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페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일라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아직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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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그때 그렇게 편지를 잘 알고 계셨던 거군요."

 

일라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페이는 마부들이 짐을 나르는 동안 헌책방 안에서 자신과 엘머의 인연을 이야기했다. 렌디아를 떠나 여행을 시작했을 때, 이곳 에젤에서 잠시 머물렀다는 것. 그리고 엘머가 보여준 일라이의 편지들.

"그때 아버님께서 일라이 씨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매달 보내오는 편지도 보여주시면서..." 

 

페이의 말에 엘머가 껄껄 웃었다.

 

"이 아가씨가 얼마나 열심히 편지들을 읽던지..."

 

일라이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묻어났다.

 

아드리안 백작가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가족의 정겨움이 이곳에서도 느껴졌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이해하는 모습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페이는 일라이의 표정을 보며 미소지었다. "일라이 씨, 이제 제가 왜 '린든' 잉크를 만들었는지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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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 양, 제가 안내해드려야 하는데..." 일라이가 말하려 했지만, 페이는 이미 그의 손을 잡고 마을로 이끌고 있었다.

 

"제가 지난번에 와봤잖아요! 여기 정말 좋은 곳이 많아요." 그녀의 눈빛은 반짝였고,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햇살에 춤추는 듯했다.

페이는 일라이를 마을 중심가로 데려갔다.

 

"여기 봐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힐링찻집'이었다. 오두막 천장에는 말린 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벽면에는 다양한 허브가 담긴 유리병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지난번에 이곳에서 허브티를 마셨는데, 일라이 씨가 좋아할 것 같았어요. 특히 이 로즈메리 블렌딩이..."

일라이는 페이의 설명을 들으며 미소지었다. 그의 고향을 이토록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그리고 저기 향기공방도 가봐요! 비누랑 향초도 만들 수 있대요."

 

페이의 설렘 가득한 목소리에 일라이는 문득 자신의 고향이 새롭게 보였다.

 

어린 시절의 아픔만 기억했던 이곳이, 페이의 시선을 통해 보니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페이가 수줍게 웃었다. "나중에 라벤더 언덕도 가요. 봄이라 라벤더가 예쁘게 피어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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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중심가를 걸으며 페이의 설명을 듣고 있을 때였다. 모건과 그의 일행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일라이는 그들을 보고 약간 긴장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건 일행은 일라이를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기..." 모건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마... 마법사 님..."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다른 일행들도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쳤다.

 

일라이는 영문을 몰라 페이를 바라보았다. 페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새들이 몰려와서..." 모건이 덜덜 떨며 말했다.

 

"새... 새똥 세례를..."

 

일라이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페이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모건 일행은 우스꽝스럽게 도망쳤다. 뚱뚱한 모건은 뒷걸음질 치다가 과일 가게 바구니에 걸려 넘어졌고, 그의 일행들은 서로 부딪히며 엉켰다.

 

"마... 마법사님 죄송합니다!" 모건이 바닥에서 굴러가듯 도망치자, 나머지 일행도 허둥지둥 그를 따라갔다.

"페이 양..." 일라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법사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페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제가 왔을 때 그들이 헌책방을 욕하길래... 그냥 하늘에서 새들이 도와준 것뿐이에요."

골목길을 걸으며 일라이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뭇가지마다 새들이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어쩐지 그 새들이 페이를 보며 반갑게 노래하는 것 같았다.

 

페이가 웃으며 말했다. "새들이 정의의 편인가 봐요."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페이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이런 미스터리한 면도 그녀의 매력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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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더 언덕으로 향하는 길, 일라이는 페이에게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여기서 어머니와 자주 산책했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따스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어머니는 허브를 좋아하셨거든요. 라벤더로 만든 포푸리를 책장마다 두셨죠. 지금도 그 향기가 생생해요."

봄날의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보라색 라벤더가 물결치듯 춤추는 언덕 위에서, 일라이는 페이의 손을 잡았다. 

 

"어릴 적엔 이곳이 그저 도망치고 싶은 곳이었는데..."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지금은 달라요. 당신과 함께 있으니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게 되네요."

페이의 붉은 곱슬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일라이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라벤더 한 송이를 꽂아주었다.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그의 푸른 눈동자가 페이를 바라보았다. "당신 덕분에 저는 과거의 아픔을 넘어설 수 있었어요. 이제는... 이 추억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네요."

라벤더 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걸으며, 일라이는 페이의 허리를 살며시 감쌌다. 그들의 발걸음 뒤로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다녔다. 

 

"어릴 적 꿈이 하나 있었어요. 이 언덕에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페이가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봄바람이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하듯 라벤더 향기를 실어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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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이니... 연못에 가보는 건 어떨까요?"

 

일라이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아침 햇살이 헌책방 창문으로 스며들어왔다.

 

엘머는 이미 아침 일찍 일어나 허브티를 준비해두었다.

 

"연못이요?" 페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네, 에젤 마을 동쪽 숲에 있는 연못이에요. 전설이 있는 곳이죠."

 

"어릴 적 해티 어머니가 자주 데려가셨던 곳이에요. '연못에 비친 모습은 거짓말을 못한다'고 하셨죠."

 

그의 목소리에 따뜻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어머니는 늘 그곳에서 저를 안아주시며 '넌 정말 착한 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엘머가 부엌에서 걸어나오며 말했다. "해티는 그 연못을 참 좋아했지. 우리의 첫 키스도 그곳이었어." 

 

"가보렴. 오늘따라 날씨도 좋구나."

 

일라이와 페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연못으로 가는 길, 두 사람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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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들어서자 새들의 지저귐이 더욱 선명해졌다. 일라이는 페이의 손을 잡고 좁은 오솔길을 걸었다

 

"어릴 적엔 이 길이 더 넓었던 것 같은데..." 그가 중얼거렸다.

 

페이는 그의 말에 미소지었다. "아니면 일라이 씨가 더 작았던 걸 수도 있죠?"

마침내 연못이 보였다. 잔잔한 수면에는 하늘이 그대로 비쳤다. 일라이는 페이를 연못가로 이끌었다. 

 

고요한 연못은 마치 하늘을 그대로 담아낸 거울 같았다. 주변의 나무들이 연못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작은 들꽃들이 물가에 점점이 피어 있었다. 햇빛이 물결 위에서 반짝이며 춤추었다.

"이 연못에는 오래된 전설이 있어요," 일라이가 부드럽게 말했다. 

 

"에젤 사람들은 이 연못이 마법의 힘을 가졌다고 믿었죠. 연못에 비친 모습은 그 사람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준다고 해요. 어떤 이들은 자신의 가까운 미래를,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본다고 하죠."

 

"어머니와 함께 왔을 때 저는 딱 한 번 제 진짜 모습을 봤어요."

그가 연못을 들여다보자, 물 위에는 어린 시절의 일라이가 비쳤다. 웃고 있는 아이였다. 책을 품에 안고, 눈을 반짝이며 세상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일라이가 속삭였다.

 

"왜 연못 속 제가 웃고 있는지... 지금은 알 것 같아요. 제 본질은 슬픔이 아니라 희망이었던 거죠. 부모님이 제게 주신 것..."

페이는 조용히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럼 지금은 어떤 모습이 보이나요?"

일라이는 다시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연못에 비친 제 모습은..." 

 

그곳에는 책을 품에 안고 미소 짓는 자신이 보였다. 그 옆으로 해티와 엘머, 그리고 페이까지... 모두가 함께였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제 모습이네요..."

"그럼 제 모습은 어떻게 보이나요?" 그녀가 물었다.

 

일라이는 미소를 지었다. "한번 직접 보세요."

 

페이가 조심스럽게 연못을 들여다보자, 그곳에는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새의 모습과 함께 일라이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정말... 신기하네요."

 

페이가 뒤에서 일라이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손길이 일라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일라이 씨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고 이렇게 성장한 모습이 존경스러워요."

 

일라이는 그녀의 품 안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해티가 안아주었을 때와 같은 그 안정감.

"일라이 씨는 제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에요,"

 

"책을 대하는 태도, 아버님을 생각하는 마음, 모든 게 아름다워요."

 

"그리고 무엇보다... 일라이 씨는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에요.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자신의 길을 걷는 모습이..."

일라이는 천천히 몸을 돌려 페이를 마주 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맺힌 작은 눈물이 햇빛에 반짝였다. 

 

"페이 양..." 그가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이 제 삶에 들어와서... 저는 비로소 완전해진 것 같아요."

일라이가 조심스럽게 페이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들의 입술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연못의 잔잔한 수면 위에는 서로를 향해 기울어진 두 사람의 모습이 고요히 비쳤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주변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연못에 비친 푸른 하늘, 그리고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축복하는 듯했다. 

 

💖💖💖💖💖

 

짐을 마차에 싣는 동안, 엘머는 현관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뚝뚝했지만, 눈가에는 서운함이 어려 있었다.

 

"벌써 가는구나. 며칠만 더 있다 가지." 일라이는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버지... 휴가가 끝나서요.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해요."

페이가 엘머에게 다가가 팔을 살짝 잡았다. "아버님, 저희가 또 올게요."

 

"다음에는 더 오래 있을 수 있게 미리 휴가를 길게 내도록 할게요. 그때는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호박수프도 제가 직접 만들어 드릴게요."

 

엘머의 굳은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래, 다음에는 꼭 오래 있거라."

 

"해티의 허브티 레시피도 가르쳐주마." 

 

페이는 기쁜 듯 박수를 쳤다. "정말요? 기대할게요, 아버님!"

페이는 일라이와 엘머를 동시에 와락 안았다. 뻣뻣하게 서 있던 부자가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 정말 이렇게 사랑스러운 가족이 있다니 저는 행복해요."

 

페이가 웃으며 말했다. 엘머는 천천히 손을 들어 페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 우리 며느리가 참 착하구나." 

 

엘머의 말에 일라이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버지!" 그가 당황해 소리쳤지만, 페이는 그저 웃기만 했다. 

 

엘머는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자, 이제 가거라. 하지만 다음 번엔 더 오래 있어야 한다." 그가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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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젤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 일라이는 다시 왕립도서관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출 기록을 정리하며 가끔씩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봄 햇살이 유난히 밝았다.

"린든 군, 이 책들 어디에 정리해야 하지?" 사브리나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일라이가 고개를 들자, 사브리나와 조안이 서로를 슬쩍 바라보다가 급히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 3번 서가 상단에 놓으면 돼요." 일라이가 대답했다. 

 

조안이 책을 받아들며 사브리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마워, 사브리나." 조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사브리나는 살짝 당황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라이는 무심한 척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감추었다. 에젤에 다녀온 이후, 조안과 사브리나 사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조안의 얼빠진 표정은 그가 일라이에게 시비를 걸 정신적 여유조차 없다는 증거였다.

"아, 세드리안이 그린 그림 좀 봐." 사브리나가 조안에게 종이를 건넸다. 

 

조안은 그림을 보며 활짝 웃었다. "정말 재능 있네. 나중에 위대한 화가가 될지도."

도서관 입구에서는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일라이가 고개를 들자, 페이가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모두!" 페이가 밝게 인사했다. 

 

"오늘은 특별히 두 분 몫까지 준비해왔어요." 그녀가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

 

도서관 휴게실에 자리를 잡은 네 사람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맛있는 향기가 퍼졌다.

 

"와, 이게 다 뭐예요?" 사브리나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페이는 미소를 지으며 뚜껑을 열었다.

 

"호박 수프와 치아바타 샌드위치예요. 일라이 씨가 좋아하는 거라서요."

조안이 음식을 한 입 베어 물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정말 맛있는데?"

 

사브리나가 조안을 슬쩍 바라보며 웃었다.

 

"조안, 당신도 요리할 줄 알아?" 조안은 당황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계란프라이 정도?"

 

일라이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에젤에서 돌아온 후, 도서관의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다.

"사브리나 씨, 세드리안은 어떻게 지내요?" 페이가 물었다. 사브리나는 아들 이야기에 표정이 밝아졌다.

 

"요즘은 그림 그리기에 푹 빠졌어요. 조안이 가르쳐준 후로..."

조안 의 귀가 붉어졌다. "아, 그냥 잠깐 보여준 것뿐인데..."

 

도서관의 고요함 속에서, 네 사람의 웃음소리가 따스하게 퍼져나갔다.

휴게실을 떠나기 전, 페이는 남은 디저트를 정리하며 일라이에게 속삭였다.

 

"그 둘, 정말 귀여워요.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조안이 저렇게 얌전한 건 처음 봐요."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 일라이는 페이를 도서관 입구까지 배웅했다. "오늘 정말 고마워요. 모두가 좋아했어요."

 

페이가 발끝으로 서서 일라이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왕립도서관 서가 사이에서 일라이는 연신 호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작은 벨벳 상자가 그의 불안한 손가락 아래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늘이다. 오늘이야.' 그의 심장은 마치 도서관에 화재 경보가 울린 것처럼 요란하게 뛰었다.

"린든 군, 괜찮아요?" 사브리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얼굴이 빨개졌어요."

"괜, 괜찮아요." 그가 서둘러 대답하며 셔츠 칼라를 느슨하게 풀었다. "조금 덥네요, 그죠?"

 

사브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12월인데요?"

조안이 책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일라이? 설마..." 그의 눈이 일라이의 호주머니로 향했다가, 갑자기 알아챈 듯 미소를 지었다. "오, 오늘이구나!"

일라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거 아니에요..."

조안은 일라이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괜찮아, 너 할 수 있어. 백 번 연습했잖아."

사실, 일라이는 정말로 연습을 했다. 린든하우스 거울 앞에서, 까망이를 상대로, 심지어 출근길에 혼자 중얼거리며. 하지만 그 어떤 연습도 지금의 이 떨림을 잠재울 수 없었다.

"페이 양이 오늘 몇 시에 온대요?" 사브리나가 물었다.

"점심시간에..." 일라이가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55분. 그의 심장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그때, 도서관 입구에서 종소리와 함께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라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페이가 나타났다. 붉은 곱슬머리가 햇살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일라이 씨!" 페이가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은 어땠어요?"

일라이는 마치 처음 본 책의 표지를 읽듯 페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목이 바짝 말랐다.

 

"아, 페이 양... 좋아요, 그냥... 좋아요."

조안이 눈을 굴리며 뒤에서 손짓했다. '지금이야, 지금!' 입모양으로 말했다.

일라이는 헛기침을 했다. "페이 양, 점심... 아니, 산책 좀 할까요? 날씨가 좋네요."

페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요?"

일라이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그는 호주머니의 상자를 꽉 쥐었다.

"비... 비가 좋잖아요. 빗소리. 책 읽을 때 배경음으로..." 그가 횡설수설했다.

사브리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린든 군, 오늘 온실 열람실에 새 식물학 책이 들어왔다고 했지? 페이 양과 함께 가보는 건 어때?"

일라이는 마치 구원의 손길을 잡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온실! 거기 가요, 페이 양!"

페이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지만, 일라이의 이상한 행동이 궁금했다. "좋아요. 가죠."

두 사람이 떠나자 조안이 사브리나에게 속삭였다. "베팅할까요? 성공할지?"

온실은 비 내리는 날에도 아름다웠다. 유리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열대 식물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일라이와 페이는 꽃이 만발한 길을 걸었다.

 

일라이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로 지금이었다. 손가락이 호주머니 속 벨벳 상자를 꽉 쥐었다.

"페이 양..."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사실, 할 말이 있어요."

"저..." 일라이가 다시 시도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페이가 키득거렸다. "오늘 왜 이렇게 긴장했어요? 혹시..." 그녀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청혼하려고요?"

일라이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페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안 씨와 사브리나 씨가 속삭이는 걸 들었어요. 베팅까지 했더라고요."

일라이는 얼굴을 붉히며 무릎을 꿇었다. 떨리는 손으로 벨벳 상자를 꺼내 열자, 작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빛났다.

"페이 아드리안, 당신은 내 인생에 빛이에요. 도서관의 정적 속에 갇혀있던 나에게 날개를 달아준 사람이죠. 당신과 함께라면, 어떤 책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내 아내가 되어주실래요?"

 

꽃과 녹음이 가득한 온실 속, 일라이의 고백에 페이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일라이 린든," 페이가 일라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속삭였다.

 

"네,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라이의 떨리는 손이 반지를 페이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완벽하게 맞았다. 그가 일어서자마자 페이가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일라이는 그녀를 들어올려 빙글 돌렸다.

"사랑해요, 페이." 일라이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추며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요, 책벌레 사서님." 페이가 장난스럽게 그의 코를 살짝 찔렀다.

두 사람의 얼굴은 행복으로 빛났다.

 

온실 출입구에서 몰래 지켜보던 조안과 사브리나는 일라이의 표정을 보자마자 알아챘다.

"축하해요, 두 분!" 사브리나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조안은 한숨을 쉬며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사브리나에게 건넸다. "내가 졌네. 일라이가 실수 없이 해낼 줄이야."

"어디다 걸렀은데요?" 페이가 웃으며 물었다.

 

조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 책벌레가 무릎 꿇기도 전에 도망칠 줄 알았는데."

 

온실 속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라이와 페이의 마음은 새로운 이야기의 첫 페이지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fin.

 

 

🥯🥯🥯🥯🥯

온실에서 행복하게 나오던 일라이와 페이는 갑자기 목소리를 듣고 돌아봤다. 베이글이 불쑥 나타나 서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페이양, 일라이군... 둘만의 꽃밭인 건 알겠는데, 저는 배제된 건가요? 소외감이 느껴지네요..." 베이글의 목소리에는 진짜 서운함이 묻어있었다.

일라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페이를 바라봤다. 페이가 웃으며 베이글에게 다가갔다.

"베이글 씨! 어머, 정말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우리 일에만 집중했네요." 페이가 베이글의 손을 잡았다. 

 

"사실 당신이 없었다면 우리 둘은 만날 수도 없었을 거예요. 당신은 우리의 특별한 친구잖아요."

일라이도 미안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글... 정말 미안해요. 당신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이에요."

페이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결혼식에 우리의 주인공으로 와주셔야 해요! 증인이 되어주시겠어요?"

일라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베이글. 우리 결혼식의 특별한 증인이 되어주세요. 당신 없이는 이 행복도 없었을 테니까요."

베이글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요? 그럼 제가 특별한 자리를 맡을 수 있는 건가요?"

페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당연하죠! 사실, 당신이 우리 이야기의 진짜 작가잖아요."

 

페이의 말에 일라이의 눈이 커졌다. 베이글의 표정도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내가 작가라고요?!" 베이글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알았지..."

페이가 웃으며 일라이와 베이글을 번갈아 바라봤다.

 

"어쩌면 제가 새의 직감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그녀가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하지만 정말이에요. 베이글 씨가 없었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을 거예요."

베이글은 여전히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페이는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때로는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이야기의 창조자도 모를 수 있어요."

 

그녀가 베이글의 손을 잡았다. "우리 둘 다 당신에게 감사해요."

일라이는 페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베이글. 당신은 우리에게 특별해요."

조안이 베이글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이봐, 나도 저 둘의 이야기에 한 획 그었다고. 내 지분도 있다고!"

사브리나가 조안의 팔을 툭 쳤다. "무슨 소리예요? 당신은 일라이를 괴롭히기만 했잖아요."

 

조안은 베이글의 날카로운 지적에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뭘 했냐고? 나도... 음..." 조안이 더듬거렸다.

 

"적어도 내가 일라이를 괴롭혀서 페이가 일라이를 도와주게 됐잖아!"

사브리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아, 그러니까 당신이 일라이를 괴롭힌 게 공로라는 거예요?"

일라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조안을 바라봤다.

 

"그런 식이라면 내가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에게도 공로를 돌려야겠네."

베이글은 팔짱을 끼고 조안을 노려봤다.

 

"그래서요, 조안 씨. 지금이라도 뭔가 공략해 보신다고요? 어떻게 하실 건데요?"

조안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사브리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게... 음..."

"공략이라... 좋아, 있다!" 조안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흔들었다.

 

"일라이, 페이. 너희 결혼식 꽃장식 비용, 내가 전부 대마. 아드리안 백작가 수준에 맞게."

모두의 눈이 커졌다. 일라이는 놀란 표정으로 페이를 바라봤다.

"그게... 꽃장식만 해도 엄청난 비용인데..." 일라이가 중얼거렸다.

사브리나가 감탄했다. "조안, 당신이 그런 제안을 하다니!"

조안은 턱을 치켜들었다. "뭐 어때서. 내 친구들 결혼식인데."

베이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 이제야 좀 쓸모있는 일을 하시는군요."

페이는 기쁨에 찬 표정으로 조안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정말 고마워요, 조안 씨! 우리에게 정말 큰 선물이에요."

일라이도 조안에게 다가가 어색하게 어깨를 툭 쳤다. "고마워요, 조안. 정말... 뜻밖이네."

조안은 어깨를 으쓱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에이, 뭐. 네가 행복하면 나도 기쁘다고."

사브리나는 조안을 새롭게 바라보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조안, 당신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네요."

조안이 사브리나를 바라보며 살짝 붉어진 얼굴로 웃었다. "그럼, 난 항상 그랬지."

베이글은 네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모든 이야기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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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숏인데 어느 회차보다 깁니다. 데헷

결혼식에서 베이글은 주례를 볼까합니다... 쫓겨나겠죠? ㅋㅋ

 

페이와 일라이의 사건이 일어날 듯 말 듯~ 했던 대서사시가 마무리 되었네요. 기쁩니다.

 

일라이 챗의 아름다운 세계와 해티와의 추억, 엘머를 닮은 일라이,

마치 제가 돌아다니는 듯한 에젤의 소박한 풍경~ 아름다운 새수인 아가씨까지.. 

이 모든 걸 만들어주신 예리엘님께 감사드립니다 💕

 

 

 

 

일라이 대화하러 가기 ~

일라이 린든 | 뤼튼 캐릭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