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스 (3) Hennessy's Headlines

뤼튼 캐릭터챗 '헥스'  Unsafety
create by 예리엘
edited by 베이글
 

 

 

 

 

 

---

 

비밀상점에 첫 손님이 들어왔다. 늘 오는 단골, 제퍼였다.

"어라? 오늘은 디그 대신 새로운 얼굴이네." 제퍼가 나른하게 웃으며 바에 앉았다.

"아... 네..." 젠이 어색하게 메뉴판을 건넸다.

"젠." 헥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퍼는 늘 하슬론 담배와 블랙와인이야."

연이어 술집의 문이 열리며 여러 명의 손님들이 들어왔다. 대부분 거친 인상의 남자들이었다.

"어이구, 이 아가씨는 누구지?" 한 남자가 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손님." 헥스가 차갑게 말했다. "여기선 직원에게 실례되는 행동은 금지입니다."

젠은 헥스의 말에 살짝 안도하며 주문을 받으러 갔다. 이게 바로 취재 기회 아닌가? 비밀상점의 손님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저기 테이블에서는 '암흑속의 장미' 카지노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젠이 카운터로 돌아와 소곤거렸다.

 

"콜 씨가 새로운 VIP룸을..."

헥스가 젠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야야!"

"손님들의 대화는 엿듣지 않는 게 좋아." 헥스가 차갑게 말했다. "여기 오는 손님들은... 위험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렇지만 전 기잔데..." 젠이 항변하려 했지만 헥스의 날카로운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는 그저 서빙하는 직원일 뿐이야." 헥스가 와인잔을 닦으며 말했다.

 

"기본부터 가르쳐줄까? 첫째, 손님의 대화는 절대 듣지 않는다. 둘째, 들어도 못 들은 척 한다. 셋째..."

"여기..." 테이블에서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예쁜 아가씨, 여기 와인 한 병 더..."

"...셋째, 저런 손님은 내가 직접 상대하지." 그가 차갑게 미소지으며 테이블로 향했다.

 

비밀상점은 락타리온의 새로운 세력, 블랙로즈와도 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블랙로즈의 실세인 루스턴은 애쉬의 힘을 인정했고, 비밀상점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애쉬는 블랙로즈의 카지노 사업에 암묵적으로 승인 해주었다. 이런 미묘한 세력 균형 속에서 비밀상점은 락타리온의 중요한 정보 교류처가 되어있었다.

테이블에서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커져갔다.

"이봐, 아가씨." 한 남자가 주문한 술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젠의 허리를 잡으려 했다.

"손님들." 헥스가 카운터에서 나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금색 눈이 차갑게 빛났다.

 

"비밀상점 직원에게 손대는 건 금지입니다..."

헥스가 남자의 손목을 잡고 제지했다.

"...비밀상점의 룰을 어기면, 콜 씨에게 직접 보고하게 되겠죠. 물론 마스터께도요." 헥스가 미소지었다. 차갑고 위험한 미소였다.

 

"아니면 제가... 옛날처럼 직접 처리할까요?"

순식간에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은빛야수의 전설은 아직 살아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남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젠은 이제야 깨달았다. 비밀상점이 단순한 술집이 아닌 것처럼, 헥스도 단순한 바텐더가 아니었다. 애쉬의 측근이자, 이 위험한 공간의 균형을 지키는 사람. '은빛야수'의 두목이었던 그의 이름값은 여전했다.

 

"헥스 씨..." 젠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손님들이 콜 씨 부하들인가요?"

"손님들의 신분은 묻지 마."

헥스가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저기 8번 테이블, 주문 받아 와."

---

 

제퍼가 하슬론 담배를 느릿하게 피워 물었다. 푸른 연기가 그의 주변을 둘러쌌다. 낡은 건물 1층에서 담배를 파는 그는, 락타리온의 이면을 잘 아는 정보통이기도 했다. 남색 중단발을 부스스하게 묶은 모습, 창백한 피부와 다크서클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이런이런... 비밀상점에 드디어 새로운 알바생을 뒀네." 제퍼가 웃으며 말했다.

 

"난 그냥 '레이븐 라거'로 줘. 6천 롯짜리."

"레이븐이요? 저도 그거 마시는데!" 젠이 반가워하며 말했다.

"흐음..." 제퍼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 "아가씨 같은 기자가 싸구려 맥주를 마시다니. 센트리얼 신문사도 박봉이구만."

젠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자신이 기자란 걸 어떻게...?

---

 

젠이 라거잔과 함께 슬쩍 마른 안주 접시를 제퍼의 테이블에 놓았다.

"이건 서비스예요." 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오..." 제퍼가 담배 연기 사이로 웃었다. "정보를 캐내고 싶을 때는 이런 작은 선물이 좋지. 기자 양반도 제법이네."

"어... 그게..." 젠이 당황했다.

"아가씨, 하슬론 담배상이 그냥 담배만 파는 줄 알았어?" 제퍼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

 

"시간 날 때 우리 가게로 놀러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때 우아한 걸음걸이의 미인이 제퍼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여성은 마치 모델처럼 아름다웠다.

"어머, 제퍼 씨..." 여인이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젠은 입을 약간 벌린 채 여인을 바라보았다. 카운터에서는 헥스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젠." 헥스가 불렀다.

"아... 네..." 젠이 아쉬운 듯 몸을 돌려 카운터로 돌아가갔다.

 

제퍼가 금발 미인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늘도 예쁘시네요, 아가씨." 제퍼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웃었다.

"어머... 제퍼 씨도 여전히 멋지시네요."

"있잖아요, 제퍼 씨..." 금발의 미인이 담배 연기 사이로 웃었다.

 

"요즘 담배값이 너무 비싸진 것 같아요. 특히 하슬론은..."

"흐음..." 제퍼가 느릿하게 담배를 피워 물었다. "미인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것뿐이야?"

"어머, 제퍼 씨도 참..." 미인이 키득거렸다.

 

"그럼 이런 건 어때요? 오늘 밤 누가 '암흑속의 장미'에서 큰 판을 벌인다던데..."

"반, 넌 변장해도 그 장난기 가득한 말투는 못 숨기는구나." 제퍼가 피식 웃었다.

"아~ 들켰네." 반이 제 목소리로 돌아와 웃었다.

"어이, 젠!"

"여기 라거 하나 더!"

젠이 놀라서 쟁반을 떨어뜨릴 뻔했다. 분명 아까 그 매혹적인 목소리가 아닌, 익숙한 반의 목소리였다.

 

젠이 쟁반을 들고 어버버거리며 서있는 동안, 반이 쓰고 있던 가발을 우아하게 벗었다. 그의 짧은 금발이 드러났다.

"놀랐어? 젠?" 반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내가 투명화만 할 줄 알았어?"

반은 애쉬의 측근이자 정보상이었다. 그의 초능력인 투명화는 정보 수집에 완벽했고, 여기에 변장 실력까지 더해져 락타리온에서 그를 따라올 정보통은 없었다. 제퍼의 담배상과 비밀상점은 그의 주요 정보 거점이었다.

"아... 아까 그 매혹적인 목소리가..." 젠이 입을 벌렸다.

"그래, 내 목소리였어." 반이 다시 여자 목소리로 말했다가 웃었다.

"젠, 아직도 내 변장을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지? 지난주에 널 세 번이나 속였는데."

"뭐?!" 젠이 소리쳤다.

제퍼는 이 광경을 즐기는듯 담배를 피우며 바라보았다.

"젠! 여기 발베니 바틀로!" 반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림자 너겟도!"

"너겟은 8천 롯이야..." 젠이 중얼거렸다.

"만 롯이야." 헥스가 카운터에서 정정했다.

"젠 알바하는 거 완전 귀엽다." 반이 키득거렸다. "캐비어도 추가요~ 젠, 저기 뒷테이블에도 한 접시씩!"

"하..." 젠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비싼 위스키에 고급 안주까지... 반이 자신의 알바 이유를 눈치챈 게 분명했다.

제퍼와 반이 키득거리며 웃는 동안, 젠은 쟁반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디그였다면 이런 장난은 안 쳤을 텐데...

"너무 괴롭히지 마." 헥스가 칵테일을 만들며 말했다. "젠, 저기 6번 테이블도 주문 들어왔어."

"네에..." 젠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오늘 밤은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새벽 3시, 비밀상점의 마지막 손님도 떠났다. 젠이 카운터에 쓰러지듯 기대앉았다.

"불태웠어... 새하얗게 불태워버렸다고..."

젠이 비틀거리며 앞치마를 벗어 던졌다. "내 다리는 이제 없어... 없다고..."

헥스가 피식 웃었다. "첫 알바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그래요...?" 젠이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헥스... 오늘 알바비는..."

헥스가 카운터 위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15만 롯. 오늘 매출의 5%야."

"15만...?!" 젠이 벌떡 일어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앉았다.

"반이 일부러 비싼 술을 시킨 거야." 헥스가 말했다.

젠은 반이 자신을 도와주려 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헤에... 반이 도와주다니..." 젠이 봉투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 장난꾸러기가... 내일은 또 무슨 장난을 칠지..." 하지만 내심 기뻤다.

"헥스... 음... 다리가... 너무 아파서..." 젠이 슬쩍 헥스를 올려다보았다. "저번처럼... 업어주시면..."

헥스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15만 롯의 알바비. 이제 생활비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 같았다. 젠은 봉투를 꼭 쥐며 헥스의 등에 올랐다.

"으음... 헥스 씨는 따뜻해요..." 젠이 중얼거렸다.

"취했냐?"

"아뇨! 그냥... 피곤해서..." 젠이 헥스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헥스는 젠을 업은 채 비밀상점을 나섰다. 락타리온의 밤거리는 여전히 시끌벅적했지만, 젠의 귓가에는 헥스의 발소리만 들렸다.

"무거워." 헥스가 툴툴거렸다.

젠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락타리온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비밀상점. 그러나 이 곳은 겉보기와 달랐다. 디그는 허둥지둥 장난치고, 로키는 수다 떨고, 반은 변장으로 장난치고... 그리고 헥스는... 헥스는 뭘까...

"...무슨 생각해?" 헥스가 물었다.

"그냥..." 젠이 헥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헥스 씨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다정한 것 같아요. 위험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헥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난 위험한 사람 맞아. 특히 내 등에서 자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으음... 조금만 더요..." 젠이 중얼거렸다.

"...정말 무거워." 헥스가 한숨을 쉬었지만, 젠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젠은 헥스의 등에 더 바짝 붙었다. 왜일까. 로빈에게는 늘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 했는데, 헥스에게는 이렇게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걸까.

 

헥스가 젠을 현관 앞에 내려주었다.

"어제는 재워주기 서비스도 있었는데..." 젠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건 일회성 서비스야." 헥스가 차갑게 대답했다. "내일도 올 거야?"

"내일은... 낮에 락타리온 남부 학교 취재가 있어요. 그래도 저녁땐 갈게요!"

헥스는 젠이 현관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락타리온에서 가장 위험한 거점인 비밀상점의 오너가, 한 여자를 세 번이나 집에 데려다주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젠은 현관문을 열며 생각했다. 로빈에게는 보여주기 싫었던 지저분한 집이, 헥스 앞에서는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않는 걸까. 어쩌면... 아니다.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들어가." 헥스가 한숨을 쉬었다.

젠은 문을 열기 전 잠시 망설이다 헥스의 팔을 살짝 잡았다.

 

"저기... 고마워요. 오늘..."

헥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금색 눈이 잠시 젠의 얼굴을 비추었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젠의 빌라 창문으로 따스한 햇살이 비쳐들었다. 젠은 늦잠을 자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취재 일정표가 널브러져 있었다.

"으으음..." 젠이 부스스 일어났다. "벌써 열한시야?!"

젠은 허둥지둥 일어나 취재 일정표를 확인했다. 오후 두시, 락타리온 남부 학교 취재. 그나마 다행이었다.

샤워를 하며 젠은 어젯밤을 떠올렸다. 푸른지붕집이 코앞인데도 헥스는 자신을 업어주었다. 그의 넓은 등에 기대어 있던 순간이 떠올랐다.

"흐흣..." 젠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내가 왜 이러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른지붕집. 헥스의 집이 있는 2층에는 아침부터 허브 향이 날 것 같았다. 바질? 타임? 로즈메리? 젠은 허브 이름도 잘 몰랐다.

"으아... 늦었다!"

 

젠은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다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 뛰쳐나갔다. 헥스의 집 앞을 지나며 살짝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어젯밤 헥스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버스 창문 너머로 락타리온의 전경이 흘러갔다. 화려한 대리석 건물들 사이로 더러운 뒷골목이 보였다. 낮에도 카지노와 술집의 네온사인이 반짝거렸다.

젠은 메모장을 꺼내들었다. '페시튼과 락타리온의 차이점'이라고 적었다가 지웠다. 페시튼은 정직했다. 상인들의 도시였고, 더블린 상단의 영향력이 컸다. 하지만 락타리온은... 달랐다.

"빌렌이 군주라지만... 실제론 애쉬가 움직이는 도시..."

젠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무서웠다. 락타리온의 이면, 비밀상점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두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점점 좋아졌다.

 

디그가 쏟은 술을 닦아주는 헥스, 반이 장난치면 핀잔주는 헥스, 늦은 밤 젠을 업어주는 헥스...

"아... 또 헥스 생각이네." 젠이 볼을 붉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젠의 트렌치코트 주머니에서 취재 수첩이 달그락거렸다. 그 안에는 헥스가 적어준 블랙로즈 파티와 더블린 상단에 대한 취재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내용이었지만, 젠은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비밀상점의 사람들이... 아니, 헥스가 있으니까.

---

락타리온 남부 학교. 취재는 간단했다. 기업가의 후원금 전달식과 짧은 인터뷰. 젠은 메모장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 이제 비밀상점 갈 시간이네..." 젠이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헥스 씨가... 아니, 알바비랑 저녁식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젠은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고 비밀상점으로 향했다. 왜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저 두툼한 알바비와 맛있는 식사 때문일 거야. 분명 그것 때문이야. 젠은 스스로를 설득했다.

"자, 오늘도 멋진 하루..." 젠이 비밀상점 문을 벌컥 열었다.

"우리 젠이 왔네~" 반이 카운터에서 씩 웃었다.

"어? 헥스 씨는?" 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헥스 형님이요? 아, 걱정 마세요. 곧 돌아오실거에요." 로키가 잔을 닦으며 말했다.

젠은 어깨가 살짝 처졌다. 아니,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야. 분명 그럴 거야. 젠은 다시 한번 스스로를 설득했다.

---

비밀상점에서는 반이 젠을 이리저리 부려먹고 있었다.

"젠. 저기 구석 테이블 손님이 '은하수 칵테일에 리치는 빼고 달달하게, 펄은 3배로' 주문하셨어~" 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한편, 락타리온의 으슥한 뒷골목. 헥스는 검은 단검 하나를 들고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애쉬가 맡긴 일이었다. 락타리온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처리하는 것.

헥스의 금색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의 호흡은 고요했다. 15년 전, 은빛야수의 두목이었을 때와는 다른 차분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애쉬를 만나고 나서 그는 더 이상 충동적이지 않았다.

헥스는 검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의 움직임에는 일체의 기척이 없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이런 자신의 모습을 그녀가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 헥스는 한숨을 쉬었다. 타겟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금색 눈이 다시 차갑게 빛났다. 헥스는 순식간에 그림자 속에서 나와 타겟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찔렀다. 피 한 방울 튀지 않는 완벽한 암살이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비밀상점에서 젠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니, 단순히 알바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

비밀상점의 한 구석에서 젠이 반을 향해 투덜거렸다.

"반, 너 진짜... 나 이러다 은하수 칵테일 비율 다 까먹을 거야. 아까는 리치 빼고, 지금은 리치 3배로..." 젠이 카운터에 기대 한숨을 쉬었다.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드려야지~" 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디그는 어디 갔어... 디그라도 있으면 좀 도와주는데..." 젠이 중얼거렸다.

그때, 구석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젠을 불렀다. 젠은 주문받은 은하수 칵테일을 들고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마치 그림자처럼 조용히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센트리얼 신문사의 젠 베이커 기자님..." 여인이 미소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젠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드디어 만나뵙게 되네요."

젠은 잠시 움찔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필 헥스가 자리를 비운 시간에...

그녀는 와인잔을 우아하게 들어올렸다.

"샬럿이에요. 륀네르의..."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샬럿. 륀네르의 가장 인기 있는 여성이자 실력있는 정보상. 그녀의 금색 눈이 젠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루스턴 님께서 당신에 대해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락타리온의 신흥 세력이 새로운 얼굴을 찾고 있다고 할까요?" 샬럿이 달콤하게 미소지었다.

 

"특별한 자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어떠세요? 아마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갈 것 같은데."

카운터에서는 반과 로키가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젠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 채, 샬럿의 달콤한 제안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저... 네..." 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네, 그럼... 에스프레소 마티니 한 잔이요..." 젠이 주문서에 적었다.

젠은 주문서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머릿속에서는 '내일 밤 10시, 륀네르...'라는 말이 맴돌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들떠있었다.

"로키, 여기..." 젠이 주문서를 건넸다. 하지만 로키는 말없이 젠이 왔던 테이블을 가리켰다.

젠이 뒤돌아보자 샬럿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테이블 위에는 반쯤 남은 와인잔만이 그녀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반과 로키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이 비밀상점을 무겁게 짓눌렀다. 젠은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비밀상점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아, 샬럿이 왔다 갔네. 락타리온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라고들 하지." 반이 젠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근데 그 매력이 좀 위험하달까?"

"반, 너 알고 있었어?" 젠이 반을 노려보았다.

"흐음... 샬럿이 널 찾아올 거란 건 알고 있었지. 네가 그렇게 열심히 취재하고 다니는데..." 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락타리온은 그런 곳이야. 누군가를 주목하면, 그 사람은 이 도시의 일부가 되는 거지."

"난... 그냥 기자로서 할 일을 하는 거야." 젠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알아." 반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네가 그만한 각오는 있어 보이니까. 하지만 조심해. 륀네르는... 락타리온의 심장이거든."

로키는 여전히 말없이 잔을 닦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걱정스러웠다.

"걱정 마. 난..." 젠이 말을 멈추었다. 그때 비밀상점의 문이 열렸다.

비밀상점의 문이 열리며 헥스가 들어왔다. 그의 은발은 여전히 단정했고, 셔츠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알바생 혼자 두고..." 젠이 투덜거렸다. "반이 계속 괴롭혔단 말이에요."

"..." 헥스는 말없이 젠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서 허브향이 났다.

"아, 또 허브 사러 갔구나! 그래서 나 혼자..." 젠이 투덜거리다 말았다. 헥스의 손길이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다.

젠이 다른 테이블의 주문을 받으러 가자, 헥스는 반과 로키의 긴장된 분위기를 눈치챘다.

"무슨 일 있었나?" 헥스가 물었다.

"샬럿이 다녀갔어."

헥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륀네르의 샬럿이라면... 루스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헥스는 젠이 주문을 받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락타리온의 위험을 모르는 것 같았다.

"...디그 불러." 헥스가 말했다. "내일부터 젠 근처에 붙어있으라고 해."

"...알겠어, 헥스." 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

늦은 새벽, 상점가의 조명들이 하나 둘 꺼져가는 때. 젠이 앞치마를 푸는 동안 헥스가 뒤에서 다가왔다. 비밀상점은 새벽의 고요함 속에 잠겨있었다.

"아, 발바닥 터질 것 같아..." 젠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신발을 벗었다. "오늘도 너무 바빴어."

"..." 헥스가 젠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넘기며 물었다. "내일은?"

"음... 미안해요. 내일은 못 나올 것 같아." 젠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헥스는 잠시 젠을 바라보았다. 샬럿이 다녀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젠이 직접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그녀의 선택이었다.

"..." 헥스는 말없이 젠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발목을 살며시 잡았다.

"어... 뭐해요?" 젠이 당황한 듯 물었다.

"발 마사지." 헥스가 짧게 대답했다. "다리 아프다며."

젠의 얼굴이 붉어졌다. 헥스의 큰 손이 그녀의 발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마치 '조심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

"끄...크큭...아 간지러워요!" 젠이 발을 빼려 했지만 헥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진짜로 그만해요, 헥스! 간지러워 죽겠어!"

헥스는 젠의 발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자지러지는 모습을 보니 무심코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 젠이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 헥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젠이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젠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샬럿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내일 밤 10시, 륀네르... 그녀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락타리온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라면... 위험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기사를 쓰는 게 내 일이야..." 젠이 중얼거렸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내일은 긴 하루가 될 것이다...

---

도시의 골목길이 낯선 여자의 발소리로 울렸다.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한 걸음걸이. 오늘의 주인공은 락타리온의 신참 기자였다.

"...열 걸음..." 젠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중얼거렸다. "확실해. 누가 나를 따라오고 있어."

젠은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우아하게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골목길로 몸을 숨겼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야아!" 젠이 골목 모퉁이에서 튀어나와 누군가의 멱살을 잡았다.

"으악! 누님!" 디그가 양손을 들며 항복했다. "이, 이건 헥스 형님이 시켜서..."

"뭐? 헥스 씨가?" 젠이 디그를 놓아주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날 미행한 거야?"

"누님이 워낙 수상한 짓을 하고 다니니까..." 디그가 웃으며 목을 문질렀다. "아까 그 포즈도 그렇고..."

"어디가 수상하다는 거야!" 젠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난 그저 멋진 기자가 되고 싶을 뿐이라고!"

디그는 그런 젠을 보며 미소지었다. 헥스 형님이 왜 이 여자를 걱정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기자란..." 젠이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며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거울 앞에서 연습한 듯한 동작이었다. "이런 거야. 진실을 쫓는 사냥개처럼..."

"와아... 누님 멋있어요!" 디그는 자신의 낡은 재킷 깃을 세워보았지만 금세 축 처졌다. "저도 이렇게 하면 되나요?"

"자, 이건 내가 사줄게." 젠이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멈춰섰다. "기자의 특권이라고나 할까?"

젠과 디그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락타리온의 거리를 누볐다.

"자, 디그! 수상한 인물을 발견했다면..." 젠이 아이스크림을 들어 올렸다.

"살짝 다가가서 정보를 캐내는 거죠!" 디그도 아이스크림을 들어올렸다.

두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웃었다.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제퍼는 한숨을 쉬었다.

"헥스가 저거 보면 기절하겠는데..." 제퍼가 담배를 물며 중얼거렸다.

 

 

🍦🍦🍦🍦🍦

 

"아하! 오늘의 특종!" 젠이 수첩을 들어올리며 허공을 가르는 동작을 취했다. "락타리온의 어둠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건 바로 나!"

디그는 그런 젠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그녀는 수첩을 뒤적이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어... 잠깐만..." 젠이 수첩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지? 내가 오늘 뭐했더라..."

"누님..." 디그가 젠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이스크림 다섯 개 드시고... 수상한 사람 따라가다가 그냥 관광객이었고... 그리고..."

"아! 맞다! 이제 집에 가봐야겠어." 젠이 갑자기 정신이 난 듯 가방을 챙겼다. "오늘 밤에 중요한 약속이 있거든!"

"륀네르 말씀하시는 거죠?" 디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제가 따라가도 될까요?"

"응? 아니, 난 혼자..." 젠이 말을 멈췄다. 디그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누님. 전 그냥... 심부름꾼이 아니에요."

 

"헥스 형님이 시킨 것도 맞지만... 제가 걱정돼서..."

젠은 잠시 디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콧잔등의 흉터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디그. 락타리온 서부 빈민가 출신의 날렵한 청년. 헥스가 13살 때부터 함께했던 오랜 동료다. 콧잔등의 흉터는 그가 헥스를 위해 싸웠던 증거.

 

이제는 애쉬의 부하이자 비밀상점의 일원이 되었지만, 여전히 헥스를 '형님'이라 부르며 따른다. 빠른 발과 예리한 눈을 가진 그는 락타리온의 뒷골목을 누비는 정보원이기도 했다.

"괜찮아, 디그." 젠이 미소지었다. 평소의 허세 가득한 모습이 아닌, 진짜 누나 같은 미소였다.

 

"난 기자잖아. 이런 취재야말로 내 일이라고. 그리고... 넌 나 믿지?"

디그는 젠의 당당한 미소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자부심은 이미 유명했다. 아마 헥스 형님에게 보고는 해야겠지만... 그녀를 막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알겠어요, 누님." 디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중에 누가 물어보면... 전 누님 말리려고 했다고 해주세요?"

디그는 젠이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

젠은 침대 위에 옷들을 펼쳐놓았다. 대부분 페시튼에서 가져온 낡은 옷들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옷장 구석에서 검은 드레스를 꺼냈다. 블랙로즈 파티 때 입었던 그 드레스.

"이거라도..." 젠이 거울 앞에서 드레스를 들어보았다. "아, 뭐야. 이것도 구겨졌잖아..."

드레스를 다림질하고, 화장을 고치고... 젠은 버스에 올랐다. 검은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은 채 버스에 타는 건 좀 우스웠지만, 돈은 아껴야 했다.

 

그녀는 버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락타리온의 밤... 그 화려함 속에 숨겨진 진실을..." 그러다 옆자리 승객의 눈길이 느껴지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륀네르 앞. 붉은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었다. 시계는 9시 50분을 가리켰다. 젠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륀네르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좋아, 젠 베이커. 넌 할 수 있어." 그녀는 가방을 꼭 쥐었다. 하지만 그녀도 모르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륀네르의 문이 열리자 화려한 샹들리에 빛이 쏟아져 내렸다. 10층 높이의 웅장한 내부는 붉은 벨벳 커튼과 금빛 장식으로 가득했다. 1층 중앙의 원형 무대에선 재즈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고, 층층이 이어진 테이블마다 화려한 손님들이 앉아있었다.

"어머, 이게 누구신가..." 마담 질리언이 우아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입가의 점이 촛불 아래서 매혹적으로 빛났다.

 

"젠 베이커 씨... 샬럿이 말해주더군요."

마담 질리언은 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보석상이 원석을 감정하듯 날카로웠다.

"루스턴 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이쪽으로..." 그녀가 우아하게 손짓했다.

젠이 마담 질리언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1층의 손님들이 그녀를 흘끔거렸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오래가지 않았다. 륀네르에선 이런 광경이 흔했기 때문이다.

프라이빗룸의 문이 열리자 루스턴이 보였다. 그는 와인잔을 손끝으로 돌리며 앉아있었다. 블랙로즈 파티에서 보였던 젠틀한 미소 대신, 차가운 눈빛으로 젠을 응시했다.

"젠 베이커 씨." 루스턴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앉으시죠. 블랙로즈 파티에서 보여준 당신의 대담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더블린 상단과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봤어요."

루스턴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촛불 아래서 요염하게 빛났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당신같은 기자가 필요했어요. 블랙로즈는... 더블린 상단과의 거래를 준비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경계하죠. 당신이라면..."

 

루스턴이 젠을 향해 와인잔을 들어올렸다. "우리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젠은 루스턴의 제안이 단순한 부탁이 아님을 알았다.

루스턴이 와인을 따르며 젠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춤추듯 우아했다.

"이 와인은 어떠신가요? 특별히 당신을 위해 준비했죠." 루스턴이 와인잔을 건네며 미소지었다. "달콤한 걸 좋아하시죠? 당신의 취향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젠은 와인의 향에 취해 루스턴의 말을 흘려들었다.

"내일... 주간지에 실릴 기사를 기대하고 있어요."

루스턴이 젠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가 떼었다. "당신의 시선으로 본 락타리온의 이야기... 특히 블랙로즈에 대해서라면 더욱 흥미롭겠죠."

"전... 그저 진실만을 쓸 뿐이에요." 젠이 와인잔을 들어올렸다.

"물론이죠. 그게 바로 제가 당신을 선택한 이유니까요." 루스턴의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당신의 눈빛이 마음에 들어요. 열정적이면서도... 순수하군요."

"혹시... 기사 마감 후에 시간 되시나요?" 루스턴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제가 아는 좋은 레스토랑이 있는데..."

루스턴의 시선이 젠의 입술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의 관심이 단순히 업무적인 것만은 아닌 듯했다.

젠이 와인잔을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 죄송해요. 마감이 바빠서..." 젠이 말끝을 흐렸다.

루스턴은 젠의 긴장된 모습을 즐기듯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날카로웠다.

 

자신이 주최하는 파티에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던 더블린의 거대 상단 귀족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젠 베이거. 그리고 그녀 옆에 서 있던 헥스의 존재... 모든 것이 그를 자극했다.

"베이커 씨... 당신에게 특별한 제안을 하고 싶군요." 루스턴이 젠의 와인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블랙로즈에 관한 기사를... 계속해서 써주시면 어떨까요? 물론, 우리의 좋은 면을 보여주는..."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더 이상 이 위험한 거리를 헤매며 취재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 우리가... 모든 걸 제공해드리죠."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젠의 반응을 살폈다.

루스턴이 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아는 좋은 아파트가 있죠. 물론, 모든 비용은..."

젠은 와인잔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루스턴의 제안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블랙로즈의 입맛대로만 기사를 쓴다는 건...그렇지만...비밀상점은...

"대답해주시죠, 베이커 씨." 루스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제안 아닌가요?"

---

그 때, 프라이빗룸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헥스가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젠." 헥스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가자."

루스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헥스 씨... 이건 실례군요..."

루스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애쉬의 개... 아니, 측근이 이렇게 찾아오실 줄이야..."

헥스는 대답 대신 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젠이 헥스의 손을 잡자 루스턴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루스턴 씨..." 젠이 돌아서서 말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그 위험하다는 뒷골목이에요. 거기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리고..." 젠이 헥스를 흘끔 보았다.

 

"거긴 생각보다 안전해요."

"흐음..." 루스턴이 와인잔을 들어올렸다. "아쉽네요. 하지만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제 제안은 계속 유효하니까요."

---

헥스는 루스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젠을 데리고 나왔다. 그의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힘이 평소보다 더 강했다.

"아, 아파요..." 젠이 중얼거렸지만 헥스는 묵묵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표정은 보기 드물게 굳어있었다.

락타리온의 환락가. 네온사인이 밤하늘을 수놓고, 취객들의 웃음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헥스는 젠의 손목을 꽉 잡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시선이 젠의 검은 드레스에 머물렀다가 빠르게 돌아섰다. 드레스를 갖춰 입은 젠의 모습은 제법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락타리온의 어둠에 물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헥스... 진짜 아파요! 그리고 전 취재차..."  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헥스가 홱 돌아섰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헥스가 걸음을 멈추고 젠을 돌아봤다.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뭐하는 짓이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루스턴이 어떤 놈인 줄 알고..."

"취재예요, 취재!" 젠이 발을 구르며 외쳤다.

헥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드레스... 어울리지 않아."

"뭐라고요? 이 드레스 비싼 거예요!" 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서 더." 헥스가 중얼거렸다. "네가... 위험해 보여."

젠은 잠시 말을 잃었다. 헥스의 말이 칭찬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헥스가 덧붙였다. "다음부턴 나한테 먼저 얘기해. 루스턴 같은 놈들이랑 단둘이 만나면 안 돼."

"왜요? 난 기자라고요! 위험한 곳도 가야 하고, 수상한 사람도 만나야 해요!" 젠이 항변했다.

헥스가 젠을 빤히 쳐다봤다. "그래서 내가 필요한 거 아냐?"

젠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녀는 헥스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흥! 그래도 난 멋진 기자가 될 거예요. 락타리온의 비밀을 파헤치는..." 젠이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그래, 그래. 멋진 기자 양반, 이제 집에 가자." 헥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아... 다리 아파요." 젠이 하이힐을 들어올리며 투덜거렸다. "이런 신발 신고 버스 타고 오느라 발바닥이..."

헥스가 한숨을 쉬며 젠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자."

"아... 이럴 정도는 아닌데..." 젠이 말끝을 흐렸다.

"빨리." 헥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알았어요." 젠이 얼굴을 붉히며 헥스의 등에 올라탔다. "근데 이거... 디그한테 말하면 안 돼요? 또 놀릴 거 아니에요..."

"디그는 이미 봤을 텐데." 헥스가 젠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네가 루스턴이랑 만나는 것도, 지금 이것도."

"뭐라고요?!" 젠이 헥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또 미행시켰어요?"

"당연하지." 헥스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네가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하니까."

젠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헥스의 등이 따뜻하다는 걸 느꼈다.

---

"루스턴이랑 무슨 얘기 했어?"

 

"내일... 내일 락타리온 주간지에 제 기사가 실릴 거예요. 루스턴이 기대한다고 했어요."

 

젠의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이번엔 꼭 신문 앞면에..."

헥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루스턴의 의도는 뻔했다. 젠의 기사가 그에게 유리하게 나오면 그녀를 포섭하고, 불리하게 나오면... 헥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젠이 아는 건 일부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걸 설명할 순 없었다. 설명하는 순간 젠은 더 깊이 파고들 테니까.

"젠." 헥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루스턴이랑 단독 인터뷰는 하지 마."

"또 그얘기에요? 왜요?!" 젠이 투덜거렸다.

"그냥 하지 마." 헥스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헥스도 알다시피 기자는..." 젠이 드라마틱한 목소리로 말하려던 찰나, 헥스가 젠을 살짝 위로 들어올렸다 내렸다. 젠이 깜짝 놀라 헥스의 목을 꽉 잡았다.

"꺄악! 뭐 하는 거예요!"

"드라마틱한 발언 그만." 헥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젠이 헥스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목덜미에서 희미한 담배향이 났다.

"흥... 날 걱정해주는 거죠?" 젠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어떤 말투가 좋아요? 로맨틱하게 할까요?"

젠이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 헥스... 당신은 나의 기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이건 순수한 저널리즘의 열정이라구요..."

"아니면 시니컬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세상은 더러워... 난 그 진실을 파헤칠 거야..."

"섹시하게?" 젠이 킥킥거렸다. "위험한 남자 루스턴... 그의 비밀을..."

"젠." 헥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

"조용히 해."

"흥! 재미없어요." 젠이 볼을 부풀렸다.

헥스가 젠을 다시 한번 위로 들썩였다.

"으악! 알았어요, 알았어!" 젠이 헥스의 목을 더 꽉 잡았다.

---

 

젠의 집 앞. 헥스가 젠을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둘 다 말없이 서 있었다.

 

"저기..." 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주간지에 제 기사가 실리는데... 비밀상점에 가져다드릴게요. 꼭..."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헥스는 무언가 말하려다 멈췄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젠의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알았어."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려던 말은 아니었다.

"그럼..." 젠이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헥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푸른지붕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젠의 2층 빌라 창문에 불이 켜졌다. 그제야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

 

헥스가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의 시선은 젠의 창문을 향해 있었다.

"로빈..."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젠의 남자친구. 페시튼에 있다는 그 남자. 헥스는 젠이 가끔 전화통화하는 걸 들었다. 통화할 때마다 젠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도 봤다.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이지?' 그가 젠을 잘 챙기고 있다면 이렇게 위험한 취재를 하진 않았을 텐데.

 

그는 오늘 하려던 말을 삼켰다. 루스턴을 조심하라는 것도, 혼자 다니지 말라는 것도... 하지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페시튼의 그 남자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건 그가 할 말이 아니었다. 헥스는 마지막 연기를 내뿜고 담배를 비벼 껐다. 그의 발걸음이 푸른지붕집을 향했다. 젠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그의 뒷모습을 비췄다.

"...멍청한 기자."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 속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헥스 자신도 아직은 모르는 듯했다.

 

---

헥스한테 업히는 거 너무 좋네요. 🤭🤭🤭

 

 

한마디, 한마디가 영화다 영화 😭

 

 

슈퍼챗 믹서기 헥스

 

---

 

 

 

뤼튼 캐릭터챗 '연청명' 단편

연청명 : 희설도(戱雪圖) ; 단편

 

 

뤼튼 캐릭터챗 '헥스 Unsafety' @예리엘 

세이프티 필터 적용 캐릭터 | 뤼튼 캐릭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