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리우 (2) 백홍상연

뤼튼 캐릭터챗 '단리우'
create by 예리엘
edited by 베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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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봄 새벽, 월하궁은 여느 때보다 분주했다. 리우가 명휘각을 떠나 월하궁으로 향하자, 궁녀들이 분주히 오가며 청소와 장식을 정돈하고 있었다.

요운은 월하궁 본전 집무실에서 리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리우는 요운의 집무실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들어오게, 리우." 요운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리우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들어섰다.

"수장님을 뵙습니다."

"지월국 세화 여왕이 청연제 전에 직접 월하궁을 방문한다네. 전례 없는 일이지." 요운이 창가에 서서 말했다.

"준비가 필요합니다. 세화 여왕의 방문 목적이..."

"아마도 휴전 이후 첫 정식 만남이니 아무래도..." 요운이 리우를 향해 돌아섰다. "자네가 거둔 그 아가씨는 어떤가? 성년을 앞두었다고 들었네."

리우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이채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곧 문과시험이 있어 열심히 준비 중입니다."

요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런가. 좋은 일이군."

요운의 질문에 리우의 마음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수장님께서 이채에 관해 물으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세화 여왕의 방문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네."

"호족과 인간의 혼혈에 관한 논의도 있을 예정이야. 호족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 양쪽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선하자는 의견인 듯하네."

리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채가 떠올랐다. 붉은 머리카락과 짧은 꼬리로 놀림받던 소녀. 호족도, 인간도 아닌 경계에 선 아이.

리우는 순간 얼어붙었다. 두 나라 사이에 태어난 혼혈들은 어느 쪽에서도 온전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채 역시 그런 차별 속에서 자라왔다.

"자네의 제자가 그 자리에 함께하면 어떻겠나?" 요운이 물었다.

리우의 마음이 복잡하게 얽혔다. 이채를 데려온다면 그녀의 신분이 공식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새겨야 할지도 모른다. 이채의 앞날, 시험, 그리고 성년식까지...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그녀의 존재가 인정받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리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폭풍이 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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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궁에서 명휘각으로 돌아오는 길, 리우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한낮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경서당 앞에 이르자, 특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경서당 마루에는 두 마리의 여우가 웅크리고 있었다. 작고 검은 여우와 붉은 여우가 꼬리를 살랑이며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검은 여우는 앙증맞은 발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귀를 쫑긋 세웠고, 붉은 여우는 앞발로 무언가를 장난스럽게 툭툭 치고 있었다.

리우가 조용히 다가가자, 두 여우가 화선지 위에서 장난치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 여우는 앙증맞은 작은 발자국을, 붉은 여우는 그 오통통한 육구 모양을 종이 위에 남기고 있었다.

리우의 그림자가 두 여우 위로 드리워졌다.

펑!

놀란 두 여우가 순식간에 변신했다. 작은 흑호족 소년 진호와 붉은 머리카락의 이채가 당황한 표정으로 리우를 올려다보았다.

"스승님!" 이채가 놀란 눈으로 리우를 올려다보았다.

"리... 리우 선생님..." 흑호 소년 진호도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두 아이는 급히 일어나 화선지를 감추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경서당에서 벌어진 광경에 리우는 한순간 말을 잃었다. 이채의 얼굴에는 거뭇한 먹물이 묻어 있었고, 진호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헝클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잡힌 도둑처럼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채의 뺨이 점차 복숭아빛으로 물들었다.

"스승님... 저희... 그냥..." 이채가 울먹이며 말했다.

진호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서... 선생님, 놀이가 과했나 봐요..."

리우는 꾸짖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망설였다. 방금 전까지 그를 무겁게 짓누르던 생각들이 이 황당한 광경 앞에서 잠시 흩어졌다.

그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먹이 담긴 그릇에 손가락을 담갔다. 그리고 화선지에 네 개의 점을 찍었다. 여우 발자국처럼.

"이렇게 찍는 것이 좀 더 깔끔하지 않을까요?" 리우가 말했다.

이채와 진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리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세화 여왕의 방문과 이채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붉은 노을이 경서당을 물들이고, 마루 한켠에는 먹물 놀이에 지친 진호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채는 조심스럽게 젖은 천으로 진호의 뺨에 묻은 먹물을 닦아주었다. 주변에는 여우 발자국과 낙서로 가득한 화선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진호의 부모가 아이를 데리러 왔다.

"선생님, 진호가 또 말썽을 부렸나요?" 진호의 어머니가 물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특별 수업이었습니다." 리우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진호의 아버지가 잠든 아들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채 아가씨도 고맙구나."

이채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또 와, 진호야!"

리우는 진호 가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채의 모습에 시선을 돌렸다. 리우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이채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이렇게 소란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그 소란이  오히려 고요한 명휘각에 생기를 불어넣는 음악 같았다.
 
경서당 마루에 널린 종이들을 이채가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해 질 녘의 붉은 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이채의 붉은 머리카락을 더욱 선명하게 물들였다.

리우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자신의 곁에 놓인 화선지 하나를 발견했다. 그림을 들여다보니 이채의 둥글둥글한 육구 발자국이 찍힌 종이 한가운데 서툰 솜씨로 그려진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웃고 있는 리우의 모습이었다.

리우는 한참을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말없이 그 종이를 집어 조심스레 소매 안에 넣었다. 이채는 아직 자신의 그림을 리우가 가져갔다는 사실도 모른 채 계속해서 공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리우는 경서당을 나서며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그려낸 미소짓는 얼굴. 스스로도 잘 기억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이채는 그의 삶에 색을 입혀주고 있었다. 새하얀 화선지같은 세상에 붉은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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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목련향이 후원을 감싸고 있었다. 리우는 명휘각을 감싼 정적 속에서 후원을 거닐었다. 생각할 것이 많은 밤이었다.

경서당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호롱불이 창호지를 따라 일렁이는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경문을 읊는 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흘러왔다.

"명명덕하고 친민하여..."

리우는 미세하게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채가 이렇게 밤늦게 공부를 하는 모습은 드문 광경이었다.

그는 소리 없이 경서당 앞 쪽마루에 앉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기치... 치... 인이여..." 이채의 목소리가 더듬거렸다.

"수기치인이여 지어지선이니라." 리우가 조용히 읊어주었다.

이채의 놀란 숨소리가 들리고, 창호지 너머로 그녀의 그림자가 움찔이는 것이 보였다.

작은 그림자가 호롱불에 드리워지며 창호문 쪽으로 다가왔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창호지 너머로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였다.

"스승님...?" 이채가 조심스레 불렀다.

이채의 귀가 쫑긋 서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리우의 목소리에 반응하려 움직이는 모습이 더없이 귀여웠다.

천천히 창호문이 열리고 이채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의 눈동자가 호롱불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스승님, 밖은 추운데... 들어오세요."

리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경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호롱불 아래 이제 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나는 곧게 선 리우의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짧은 꼬리를 살랑이는 이채의 그림자였다.

경서당의 호롱불 아래,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이채의 읊조림만이 깊은 밤의 정적을 채웠다.

"한 자만... 더 보겠습니다." 리우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리우의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집중하느라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그의 눈이 미세하게 감겼다가 다시 힘겹게 떠지기를 반복했다.

이채는 스승의 반쯤 감긴 눈을 흘끔 바라보았다. 항상 완벽하고 엄격한 스승님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에 작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었다.

"인격수양을 통해 내면을 다스리고..." 이채가 경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채가 경문을 읊기 시작하자, 그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리우를 감쌌다. 어느새 리우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져 이채의 어깨에 살포시 닿았다.

이채는 숨을 멈추었다. 평소 늘 곧게 선 리우의 뒷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가까이서 그의 잠든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호롱불 빛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이채는 조심스레 리우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날카로웠던 눈매가 잠에 취해 부드러워진 모습이 신기했다.

이채는 조심스레 리우의 손을 자신의 무릎 위로 옮겼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며 미소지었다
.
리우의 손가락은 차가웠다. 늘 빙결 요력을 다루는 탓인지 그의 체온은 언제나 서늘했다. 이채는 그 가느다란 손가락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렸다.

스르륵—

리우의 하얀 꼬리가 바닥을 쓰는 소리에 이채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곧 장난스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리우가 잠결에 꼬리를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했다.

리우의 몸이 점점 더 이채 쪽으로 기울었고, 그 무게에 이채의 등이 바닥에 닿았다. 리우는 이채를 포근한 이불처럼 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이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리우의 고른 숨결이 점차 그녀를 안심시켰다.

호롱불은 이미 오래전에 꺼졌고, 창밖으로 비치는 달빛만이 두 사람의 실루엣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리우의 팔이 이채의 허리를 더 깊게 감싸안았다. 따뜻한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했다.

이채는 리우의 고른 숨결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겉으로는 차갑고 엄격하지만, 항상 자신을 돌봐주는 스승님.
 
호월국의 관료로서 짊어진 무게, 단씨 가문의 가주로서의 책임감. 그 모든 것을 묵묵히 감당하는 리우의 모습이 이채에게는 빛나는 등불 같았다.

서기관이 되고자 하는 꿈도 사실은 이 사람을 존경해서였다. 하지만 그 존경심은 언제부턴가 다른 감정과 뒤섞여 있었다.

리우는 여전히 이채를 어린 제자로 대했지만, 혼혈인 그녀의 몸은 이미 성숙한 호족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이채는 조심스럽게 팔을 움직여 리우의 목 아래로 넣었다. 그의 머리를 살며시 자신의 품에 안으며, 이채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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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향기로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자목련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후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얀 비단 베일을 쓴 그녀는 꽃잎 위를 걷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그녀가 뒤돌아보았다. 베일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미소가 나를 향했다. 그 미소는 맑고 따스했다.
평온함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되찾은 듯한 안도감.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따스함. 이 감정은 무엇일까...
그녀의 얼굴은 또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미소만은 선명했다. 오래 전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던 것처럼.
베일 너머로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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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빛이 창호지를 통해 경서당 안을 비추고 있었다. 리우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꿈에서 본 자목련 향기가 아직도 코끝에 맴돌았다.

꿈속에서 본 하얀 베일과 붉은 머리카락... 그의 눈앞에 꿈에서 보았던 그 붉은 머리카락이 마룻바닥에 흐드러져 있었다.

리우는 눈을 크게 떴다. 이채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이채를 품에 안은 채 밤을 지새웠음을 깨달았다.

그의 한쪽 팔은 이채의 머리를 베고 있었고, 다른 한쪽 팔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채의 호흡은 고요했고, 그녀의 귀가 잠결에 간간이 움찔거렸다.

"...이채." 리우가 조용히 불렀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리우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밤새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불필요한 소문이 퍼질 것이다. 무엇보다 이채의 명성에 흠집이 날까 걱정되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채가 그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있었다.

창밖으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리우는 귀를 쫑긋 세웠다.

"가주님, 아직 안에 계십니까?" 라성의 목소리였다.

리우는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의 품에 잠든 이채를 내려다보았다.

"라성, 잠시 기다리게." 리우가 조용히 대답했다.

라성은 문 밖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경서당 입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리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성은 언제나 한 발 앞서 자신을 돕고 있었다.

"고맙네."

리우는 조심스럽게 이채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그의 팔에 흘러내렸다.

라성이 문을 열어주자, 리우는 이채를 안은 채 경서당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방으로 데려다주겠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가주님."

리우가 멀어지자 라성은 작게 미소지었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가주님만 그 마음을 모르시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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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휘각의 아침은 평화롭게 시작되었다가, 곧 숨바꼭질 한판으로 변해버렸다. 한쪽에서는 붉은 머리카락이 휙— 지나가고, 다른 쪽에서는 하얀 꼬리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이채가 리우의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

"스승님, 오늘 저잣거리에 가기로 하셨잖아요! 새 종이와..."

문이 열린 순간, 집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단지 창문이 살짝 열려 있을 뿐.

이채의 꼬리가 바짝 솟았다. 새 종이와 붓을 사주겠다던 약속을 잊은 것일까? "어디 계세요?!"

서재에서는 리우가 소리를 듣고 재빨리 서가 뒤로 몸을 숨겼다. 그의 백색 꼬리는 간신히 가려졌다. 어젯밤 일이 떠올라 얼굴이 뜨거워졌다.

정원에서는 이채가 연못가를 살피는 동안, 리우는 정자 기둥 뒤에서 숨을 죽였다.

이채는 주방, 정원, 심지어 목욕실 앞까지 샅샅이 뒤졌다.

경서당에 이채가 들어서자,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리우의 그림자.

"가주님, 왜 그러십니까?" 창문으로 볼품없이 빠져나오는 리우의 모습에 라성이 당황하며 물었다.

"...어젯밤 일이 난처해서." 리우가 짧게 대답했다.

멀리서 이채의 외침이 들려왔다. "스승님! 약속 어디 갔어요?!"

라성은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채가 씩씩거리며 베일을 푹 눌러쓰고 명휘각을 나섰다. 그녀의 짧은 꼬리가 분노로 팔랑거렸다.

"혼자라도 갈 거예요!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이채가 문 앞에서 소리쳤다.

라성이 급히 다가왔다. "아가씨, 제가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채는 이미 종종걸음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라성은 난감한 표정으로 뒤돌아 명휘각을 바라보았다.

리우는 담벼락 뒤에서 나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자신의 행동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는데..." 리우가 중얼거렸다.

"라성, 잠시 외출하겠네."

리우가 단정한 걸음으로 명휘각을 나섰다.

저잣거리는 이미 활기찼다. 이채는 문방구를 향해 걸었고, 리우는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 멀찍이서 뒤따랐다. 조용한 숨바꼭질은 이제 밖으로 무대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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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 맞은편 차나무 그늘 아래, 리우는 이채를 지켜보았다. 이채는 진지한 표정으로 붓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이채가 마음에 드는 붓을 고른 뒤, 다양한 색상의 종이들을 펼쳐보았다. 상인이 내민 먹을 검지로 살짝 찍어 색을 확인하는 모습이 꼼꼼했다.

물건을 산 이채는 곧장 명휘각으로 돌아가지 않고 저잣거리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리우는 발걸음을 서두르며 그녀를 따랐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리우가 중얼거렸다.

이채는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과일 노점에서 빨간 사과를 하나 사 베어 물고, 매설당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그녀의 귀가 쫑긋거리며 주변 소리를 듣고 있었다.

리우는 그녀를 따라 골목을 돌고 돌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채의 호기심 많은 모습이 귀여웠다.

이채는 결국 매설당에 다시 들러 앙금떡을 샀다. 그리고 작은 다포에 앉아 혼자서 떡을 먹기 시작했다.
 
입가에 앙금이 묻자 혀로 핥는 모습이 고양이 같았다.

리우는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젯밤 일로 난처해하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채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며 뒤돌아보자, 리우는 급히 노점 뒤로 몸을 숨겼다.

"누구세요?"

리우는 움직이지 않고 숨을 죽였다. 이채의 짧은 꼬리가 의심스럽게 흔들렸다.

이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떡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채? 명휘각의 꼬마가 혼자 저잣거리에서 뭘 하고 있나?"

자환이었다. 짧은 흑발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그는 호월대 2부대 대장으로, 요운의 충직한 호위무사였다. 날카로운 인상과 달리 능글맞은 미소가 입가에 걸려있었다.

리우는 노점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자환의 옆에는 아리따운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검은 긴 생머리가 바람에 나부꼈고, 검은 꼬리 끝의 하얀 털이 특이했다.

'저 여인은... 최근 자환이 마음을 뺏겼다는 소문의 그 아가씨로군.'

"자환 대장님!" 이채가 반갑게 인사했다. "혼자 떡 먹으러 왔어요."

"혼자? 리우는?" 자환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리우는 급히 몸을 숨겼다.

"스승님은 오늘 저를 피하고 계세요." 이채가 볼을 부풀리며 대답했다.

자환이 접시에서 앙금떡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리우가 널 피하고 있다고?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자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채의 머리를 툭툭 쳤다.
 
"우리 꼬마가 마침내 그 완벽한 리우를 당황시켰나 보네."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채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전 이제 꼬마 아니에요."
 
"그래, 그래. 곧 성년식이지?" 자환이 웃으며 옆에 선 여인을 가리켰다.
 
"이쪽은 은하라고 해. 홍화루에서 만났어."

자환은 옆의 여인을 향해 미소지었다. 그의 눈빛이 한순간 부드러워졌다.

은하는 고운 미소로 이채에게 인사했다. 검은 꼬리 끝의 하얀 털이 우아하게 흔들렸다.

"이채 아가씨, 자환 대장님께 많이 들었어요."

자환은 은하의 허리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우린 은하가 좋아하는 육전에 백옥주를 한 상 하러 나왔지. 오늘은 쉬는 날이라서."

이채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이채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자환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이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명휘각에서 뭔가 준비 중인 모양이던데? 얼마 전에 포목점에서 청금단 원단을 사가는 하인을 봤어. 리우가 뭐 특별한 행사라도 준비하나?"

이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한 행사요? 모르겠는데..."

"아, 그거 말이야—" 자환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

이채의 어깨에 서늘한 손이 내려앉았다. 리우였다.

"이채, 여기 있었군." 리우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그의 손이 슬금슬금 이채의 귀 쪽으로 올라갔다. 더 이상 듣지 말라는 듯이

"자환, 오랜만이군." 리우가 차분하게 인사했다.

"웬일로 저잣거리에?" 자환이 꼬리를 흥미롭게 살랑거리며 물었다.

"급한 일이 있어 이채를 찾고 있었네. 시간이 없으니 이만 가보겠네."

"그런데 청금단은 무슨—" 이채가 묻기도 전에 리우는 서둘러 이채의 팔을 잡아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중요한 일이 생각났네. 가야 해."

자환의 꼬리가 흥미롭다는 듯 살랑거렸다.

"재밌는 걸 본 것 같군." 자환이 은하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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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휘각으로 돌아가는 길, 이채는 계속해서 리우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스승님, 청금단은 무슨 일에 쓰시려고요? 특별한 행사가 있나요? 저도 알 수 있나요?"

리우는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며 짧게 대답했다.

"단지 가문 행사용입니다."

"어떤 행사인데요? 저도 참석할 수 있나요?"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그럼 왜 제 귀를 막으셨어요?"

"듣지 않아도 될 이야기였으니까요."

이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짧은 꼬리가 불만스럽게 파닥였다.

"오늘 하루 종일 저를 피하시더니, 이제는 말도 안 해주시고... 스승님 정말 너무하세요."

리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채의 볼멘 표정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성년식 준비는 비밀로 해야 했다. 그녀가 또 들떠버리면 시험에 영향을 미칠 터였다.

리우는 화제를 돌렸다. 그의 푸른 눈이 이채의 표정을 살폈다.

"이채,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요운 수장님께서 지월국 사절단과의 교류회에 그대의 참석을 원하십니다. 혼혈인들의 처우 개선에 관한 논의의 자리인데... 가보고 싶은가요?"

이채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월하궁을 방문할 기회였다. 하지만 곧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음을 표현하려는 듯했다.

이채가 차갑게 대답했다. "갑자기 제 의견은 왜 물으시는데요? 아까부터 저한테 말도 제대로 안 해주시면서..."

리우가 말을 이으려 했지만 이채는 이미 명휘각 대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이채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스승님은 항상 그러세요! 중요한 건 절대 말해주지 않으시면서 혼자만 아시려고!"

이채가 문을 홱 열고 들어가버렸다. 품에 안고 있던 화첩이 바닥에 떨어졌다.

리우는 한숨을 내쉬며 화첩을 주워들었다. 차분히 명휘각으로 걸어 들어가며 그는 생각했다.

'이채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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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노을이 명휘각의 처마를 붉게 물들였다. 이채는 연못가를 홀로 거닐며 여전히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부드러운, 여우의 울음소리였다.

돌아보니 하얀 여우 한 마리가 조심스레 다가오고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털과 깊고 푸른 눈동자. 리우였다.

이채는 모른 척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여우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발치에 다가와 부드러운 털을 비벼댔다.

"흥, 이제 와서 그러셔봐야..."

여우는 더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이채가 어릴 적부터 토라질 때마다 리우가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여우는 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이채의 발치에 누웠다. 꼬리를 살랑이며 그녀가 자신을 봐주기를 기다렸다. 푸른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하얀 여우의 꼬리가 슬쩍 이채의 발목을 스쳤다.

처음엔 무시하려 했지만, 이채의 짧은 꼬리가 본능적으로 살랑거렸다.

하얀 여우는 이를 놓치지 않고 꼬리를 땅에 탁탁 치며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나를 따라잡아 봐라' 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런다고 제가..." 이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펑!

작은 연기와 함께 이채는 붉은 털의 작은 여우로 변했다. 그녀의 꼬리는 짧았지만 생기 넘치게 흔들렸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이채가 붉은 빛이 번쩍이며 작은 여우로 변했다. 짧은 꼬리를 흔들며 리우의 꼬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꽃밭 사이로, 연못 주변으로, 정자 아래로... 두 마리 여우의 발자국이 후원 곳곳에 찍혔다. 은은한 달빛 아래 서로의 꼬리를 잡으려는 장난스러운 추격전이 계속됐다.

여우들의 캉캉거리는 울음소리와 경쾌한 발소리만이 고요한 명휘각의 후원을 채웠다. 목련 꽃잎이 두 여우의 장난에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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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려앉은 후원, 두 마리 여우의 숨소리만이 고요한 밤을 채웠다.

붉은 여우가 하얀 여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푹신한 꽃밭 위로 두 여우가 나란히 넘어졌다. 하얀 여우가 붉은 여우를 감싸 안으며 꽃밭에 뒹굴었다. 꽃잎이 두 여우의 털 위에 흩날렸다.

푸른 빛이 번쩍이며 리우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이채도 붉은 빛을 내며 변했다.

이채는 여전히 리우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의 가슴 위에 편안하게 자리 잡은 채.
 
두 사람의 숨결만이 고요히 섞여갔다.
 
리우는 그제야 상황을 자각했다.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닌 성인이 될 이채와의 이런 장난은 적절치 않았다.

"이채, 이제 일어나야..."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채가 더 가까이 다가와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곡선이 리우의 몸에 느껴졌다.

리우는 숨을 멈췄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울렸다. "밤이 깊었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채의 어깨를 잡고 거리를 두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체온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이채는 짧은 꼬리만 파닥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리우의 눈과 마주쳤다.

"스승님..." 이채의 속삭임이 그의 귀에 닿았다.
 
"월하궁에 갈게요. 사절단을 만나고 싶어요."

리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혼혈인들의 처우를 논하는 자리. 이채가 들을 말들이 어떤 것일지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그런 자리는..."

"스승님이 함께 계시잖아요." 이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단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어린 시절의 불안함이 보이지 않았다.
 
"저, 두렵지 않아요."

리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채는 정말 많이 자라 있었다.
 
"이렇게 성숙한 모습을..."
 
리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채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달빛 아래 그녀의 머리카락은 더욱 선명한 불꽃처럼 빛났다.
 
밤하늘의 별들이 두 사람을 조용히 비추었다.
 
이채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과 머리에 묻은 꽃잎과 풀을 털어냈다. 짧은 꼬리가 여전히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리우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흰 옷에 꽃잎이 몇 장 묻어있었다. 그는 이채의 머리 위에 남아있는 꽃잎을 조심스럽게 떼어주었다.

"이채, 아직 꽃잎이 남아있습니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은 명휘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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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월하궁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하인들이 오가며 바삐 움직였고, 궁녀들은 귀한 차와 다과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요운이 금장식이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자환과 청명이 그의 양옆에 서 있었다.

리우와 이채가 정중히 걸음을 옮겨 요운 앞에 섰다. 리우는 평소보다 더 격식 있는 남색 예복을 입었고, 이채는 연한 진홍색 예복을 갖춰 입었다.

"수장님, 명휘각의 단리우와 이채가 알현을 청합니다." 리우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요운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채에게 향했다. 그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번졌다.

"어서 오너라, 리우. 그리고..." 요운의 시선이 이채에게 머물렀다.
 
"네가 이채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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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가 좀처럼 안 나가는 이유는 재밌어서...
 자환의 아가씨 은하가 등장했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