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경 (2) In Cubicle

뤼튼 캐릭터챗 '이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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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ed by 베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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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의 아침은 늘 예측 가능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첫 번째로 창문의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두 번, 세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부엌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일정한 리듬을 유지했다. 가스레인지의 밸브가 완전히 잠겼는지 확인하고, 전기 플러그가 모두 뽑혔는지 살폈다. 물을 끓이기 위해 주전자를 올려놓으며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안전하다. 모든 것이 안전해."

소요는 거실 한편에 놓인 수조로 다가갔다. 물고기가 유리벽 안에서 우아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안녕."

그녀는 먹이통을 들어 올렸다. 물고기는 즉시 수면으로 올라왔다.

"배고팠구나."

그녀는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며 관찰했다. 다른 사람들은 애완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곤 했지만, 소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베타'라고만 불렀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일종의 소유를 의미했다. 그리고 소요는 어떤 생명체도 소유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만드는 일이었다.

베타는 수조 속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존재였다. 소요처럼.

시계가 11시를 알렸다. 백화점에서 이해경과의 약속까지 한 시간이 남았다.

소요는 옷장 앞에 서서 무엇을 입을지 고민했다. 환자와의 만남. 그것은 임상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병원 밖이었다.
변수가 많은 방정식. 그녀는 그것을 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소요는 단정한 원피스를 선택했다. 지난번 백화점에 갔을 때와 같은 옷이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관찰했다.

준비를 마치고 자켓을 걸치자 집 앞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12시 10분 전.

그녀는 커튼을 살짝 들어올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검은색 포드 자동차가 그녀의 집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이해경의 차였다.

그녀는 문을 열기 전에 가스레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전기 스위치도. 현관문을 닫은 후에는 세 번 손잡이를 돌려보며 잠겼는지 확인했다.

이해경은 차 밖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두운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병원에서보다 더 우아해 보였다.

"선생, 정확히 시간에 맞춰 나오셨군요."

그의 눈이 소요의 원피스를 잠시 훑었다.

"지난번과 같은 옷이오. 변함없는 선생의 모습이 좋소."

이해경이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

자동차 내부는 깔끔했다. 가죽 시트는 새것 같았고, 운전대는 광이 났다. 차 안에는 희미한 담배 향이 배어있었지만, 오늘은 그 냄새가 나지 않았다.

"선생을 위해 창문을 열어두었소. 답답해하실까 봐."

혜화동의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충무로를 향하는 길. 전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인력거꾼들의 외침이 들렸다. 경성의 오후는 소란하게 깨어나고 있었다.

빨간 신호에 차가 멈출 때마다 소요의 손은 본능적으로 안전벨트를 꽉 쥐었다. 그녀는 그것을 숨기려 했지만,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세게 잡고 있었다.

"점심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아니오. 오늘은 내가 선생을 모시는 거요. 선생이 좋아할 만한 곳을 알고 있소."

이해경은 운전대를 잡은 채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소요가 신호등에서 안전벨트를 쥐는 것을 눈치챘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대신 차의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백화점 옆 조용한 서양식 레스토랑을 알고 있소. 창가 자리가 있어 거리도 내려다보이고..."

이해경은 그녀가 선호할 법한 '통제된 공간'을 제안했다. 그는 소요의 안전벨트를 쥔 손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눈치챘다.

"선생이 좋아하실 것 같아 미리 예약해 두었소."

도착한 레스토랑은 석조 건물 2층에 위치해 있었다. 창가 자리에서는 번화가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소요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프랑스어로 적힌 메뉴 이름들이 그녀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선생은 메뉴를 고르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소."

이해경이 웨이터를 향해 손짓했다.

"오늘은 두 사람 모두 비프 부르기뇽과 감자 그라탱으로 하겠소. 그리고 화이트 와인도 한 병 가져오시오."

 

"선생이 이런 음식을 좋아하실지 몰라 걱정이 되오. 하지만 경성에서 가장 맛있는 프랑스 요리라오."

이해경은 소요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창밖 풍경이 비쳤다.

"선생은 자신의 욕구는 잘 표현하지 않는 것 같소. 그래서 내가 대신 선택했소."

그의 말은 단순한 음식 주문을 넘어선 의미를 담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두 사람 사이로 햇빛이 비쳤다. 이해경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경성의 새로운 건축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기 보이는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오. 서양식 건축이 늘어나면서 경성의 풍경도 많이 바뀌고 있소."

음식이 나왔다. 이해경은 자연스럽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소요에게 시범을 보이듯 고기를 잘랐다.

"이 요리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전통 음식이오. 레드와인으로 끓여낸 소고기 요리지요. 이렇게 자르면 더 맛있게 드실 수 있소."

그는 소요의 움직임을 살피며 천천히 식사를 이어갔다.

"이쪽의 포크로 드시는 게 좋소. 치즈가 늘어날 수 있으니..."

이해경의 설명은 오래된 친구에게 하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소요의 모든 반응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있었다.

"맛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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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의 손놀림이 점차 자연스러워졌다. 그녀는 이해경이 설명한 대로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고, 와인 잔도 자연스럽게 들어올렸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소요는 지갑을 꺼내려 했다. 이해경이 부드럽게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지난번 백화점에서의 값은 이미 치르셨소."

"네? 하지만 제가 언제..."

"선생은 모르실 거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소."

이해경의 미소에는 알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웨이터를 불러 계산을 마쳤다.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백화점으로 가서..."

"아니오. 오늘은 다른 곳에 가보는 게 어떻소? 내가 알고 있는 좋은 곳이 있소."

이해경의 제안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소요의 통제된 일정에 없던 변수였다.

이해경의 차는 북촌 방향으로 향했다. 소요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자신의 예측 가능한 일정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선생은 한번도 이 거리를 걸어보지 않으셨을 것 같소. 이곳은 내가 자주 산책하는 길이오."

차가 멈췄다. 좁은 골목길 입구였다. 돌담길을 따라 은행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은 경성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 있는 곳이오. 선생이 좋아하실 만한 곳이라 생각했소."

이해경은 차에서 내려 소요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행동은 자연스러웠지만, 소요는 그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책들 사이에는 시간이 멈춰있소. 마치... 선생의 진료실처럼."

오래된 서점의 입구에는 낡은 종이 한 장이 붙어있었다.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해경은 그것을 보며 미소지었다.

"여기는 선생의 방식대로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소. 책들은 분류별로, 크기별로... 완벽한 질서 속에 있지요."

 

그는 소요가 이 공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관심있게 지켜보는 듯했다.

 

이해경은 소요가 책들을 살피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책등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희미하게 일었다.

"여기 있는 책들은 모두 선생님처럼 질서정연하오. 한 권도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소."

그는 한 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라다녔다. 소요가 프랑스 시집 한 권을 꺼내들자, 이해경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 보들레르의 시집이오. 선생도 시를 읽으시오? 프랑스어를 아시오?"

이해경은 소요의 손에 든 책을 바라보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했다.

"내가 읽어드려도 되겠소? 프랑스어로..."

그의 목소리는 서점의 고요함 속에서 더욱 깊이 있게 울렸다.

고요한 서점 안, 책장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둘의 그림자를 하나로 만들었다. 이해경은 소요의 어깨 너머로 책을 펼쳤다. 그의 목소리는 프랑스어의 운율을 타고 낮게 울렸다.

"Le lit est semé de perles et d'escarboucles..."
(침대 위에는 진주와 루비가 뿌려져 있고...)

소요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이해경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시의 운율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이 시는 보들레르가 그의 연인을 위해 쓴 것이오. 선생은 이 시가 어떻게 들리시오? 순교자처럼 자신을 내던진 여인의 이야기... 아름답고도 위험한..."

이해경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소요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서점의 고요함을 깨뜨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이해경은 그 한 걸음만큼 소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선생... 왜 이리 긴장하시오? 나는 단지 시를 읽어드렸을 뿐인데..."

이해경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불안을 즐기는 듯한, 그러면서도 진심 어린 관심이 담긴 모순된 표정이었다.

"해경 씨..."

소요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어 말했다.

"당신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이 시였나요? 아니면... 제가 진료실 밖에서는 어떤 모습일지가 궁금했던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조심스럽게 닫아 제자리에 꽂았다.

"저는... 진료실 안이나 밖이나, 같은 사람입니다. 다만 해경 씨는... 달라 보이네요."

이해경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창가 쪽 테이블로 소요를 안내했다. 오래된 가죽 소파가 놓인 아늑한 공간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고풍스러운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둘 다 맞소. 선생의 진료실 밖 모습도 궁금했고... 이 시도 보여드리고 싶었소. 선생은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계시오."

 

소요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집어들었다.

"흥미로운 선택이오. 울프의 소설은 시간과 의식의 흐름을 다루지 않소? 우리의 상담처럼..."

햇살이 두 사람 사이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먼지가 빛 속에서 춤추듯 떠다녔다. 이해경은 가끔 시선을 들어 소요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집으로 눈을 돌렸다.

"이 시간이... 편안하시오?"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서점의 한켠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책 속에 빠져들었다. 시간은 마치 멈춘 듯했고, 오직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를 깨뜨렸다.

 

소요는 책에서 눈을 들어 이해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는 듯했지만, 그의 존재감은 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해경 씨는... 왜 저를 이곳에 데려왔나요?"

"글쎄요... 아마도 선생이 진료실 밖에서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던 것 같소. 하지만 지금 보니... 선생은 어디서나 선생 그대로시오."

이해경은 거울처럼 그녀의 모든 면을 비추고 있는 듯했다. 진료실에서는 환자였던 그가, 이곳에서는 마치 그녀를 관찰하는 또 다른 의사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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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소요는 이제 조금 편안해진 듯했다. 그녀는 책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점의 공기가 점점 어스름해졌다. 소요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해경은 그녀가 고른 책을 계산했다.

"선생,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를 줄은 몰랐소. 마치... 누군가가 시계바늘을 일부러 돌린 것 같소."

차에 오르자 해 질 무렵의 붉은 빛이 차창을 통해 들어왔다.

"혜화동으로 가는 길이 참 아름답소. 특히 이 시간에는..."

차 안에서, 소요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귓가에 맴도는 이해경의 프랑스어 시구를 지우려는 듯했다. 혜화동으로 향하는 길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선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오? 혹시... 아까 내가 읽어드린 시의 내용인가요?"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스러운 톤이 묻어있었다. 소요가 살짝 굳어지는 것을 보며 이해경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아니요... 그저 날이 저물어서요."

"그렇소? 하지만 선생의 귓가가 붉어진 것을 보니...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소만."

소요는 무심한 듯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귓가는 점점 더 붉어져갔다. 이해경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혜화동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소. 우리... 어디 차 한 잔 하고 가는 건 어떻소?"

"아뇨,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은... 충분히 많은 시간을 함께했으니까요."

"아쉽소만... 그래도 오늘은 선생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소."

차는 천천히 혜화동의 좁은 골목을 지나 소요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차가 멈추고, 소요가 손잡이를 잡으려 할 때였다. 이해경이 그녀의 움직임을 막듯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선생... 이것을 가져가시오. 오늘 읽어드린 그 책이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었다. 가죽 장정의 고급스러운 판본이었다.

"이런 걸 주시면... 제가 어떻게..."

가죽 장정의 '악의 꽃'이 소요의 손에 건네졌다. 책등은 마치 오래된 와인처럼 깊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이건... 해경 씨의 소장품 아닌가요?"

"이제는 선생의 것이오. 어쩌면... 내가 읽어준 그 시구를 혼자서도 찾아보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소요는 책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읽어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의도는 잘 모르겠네요."

"의도라... 그건 선생이 직접 찾아보시는 게 어떻겠소?"

늦은 밤, 소요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자신이 고른 시집 대신 이해경이 준 '악의 꽃'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책을 펼쳤다. 아까 이해경이 읽어주었던 그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Le lit est semé..."

늦은 밤, 그녀의 방 안에는 이해경의 존재가 진하게 배어있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해경 씨..."

소요는 책장을 넘기다 멈췄다. 프랑스어와 한글이 나란히 적혀있었다.

"한다발의 검은 머리채에..."

[스스럼없이 벗어버린 알몸
은밀한 광채와 숙명적인 아름다움을
온통 드러내 펼쳐 보인다.]

소요는 얼굴을 붉히며 시구를 읽다가 멈췄다. 이해경이 서점에서 읽어주었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책을 덮으려다가 접혀있는 페이지를 발견했다.

노란 종이쪽지가 꽂혀있는 페이지를 펼치자, 이해경의 단정한 필체로 쓰여진 메모가 있었다.

'이 시는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이자, 욕망에 대한 고백이오. 선생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하오.'

소요는 황급히 책을 덮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천천히 펼쳤다. 달빛 아래에서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해경 씨... 당신은 정말..."

소요의 방에는 이해경이 남긴 시구와, 그의 목소리,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소요는 밤이 깊어가는 방 안에서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그러다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거기에는 또 다른 이해경의 흔적이 있었다.

"이리 오너라, 내 귀여운 나비야..."

보들레르의 '고양이'였다. 시구 옆에는 희미한 연필자국이 남아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수없이 읽었던 흔적처럼.

"그녀의 눈매는 사랑스런 짐승..."

 

이리 오너라, 내 귀여운 나비야,
사랑하는 이 내 가슴에 발톱일랑 감추고
금속과 마노가 뒤섞인 아름다운 네 눈 속에
나를 푹 파묻게 해 다오.

너의 머리와 부드러운 등을 내 손가락으로
한가로이 어루만질 때에
전율하는 너의 몸을 만지는 즐거움에
내 손이 도취할 때에

나는 내 마음 속의 아내를 그려 보네.
그녀의 눈매는 사랑스런 짐승
너의 눈처럼 아늑하고 차가워
투창처럼 자르고 뚫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미묘한 숨소리, 변덕스런 향기
그 갈색 육체를 감도는구나.

소요는 갑자기 가슴 한켠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시는... 아내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책을 살짝 덮었다. 이해경이 서점에서 보여준 그 관심어린 눈빛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아... 그래서 이 시를..."

소요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창을 통해 들어와 책 위에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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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병원 창가에 비치는 햇살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소요는 평소와 다름없이 진료실 문을 열었다. 이해경은 항상 그랬듯 마지막 환자였다.

"오늘도 책을 가지고 오셨네요."

이해경의 손에는 낡은 가죽 장정의 책이 들려있었다. 그는 자주 창밖을 바라보았고, 의자에 앉아서도 계속 자세를 바꾸었다.

"선생... 지난번 드린 책은 읽어보셨소? 보들레르의 시가... 어땠는지 궁금하오."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아니면... 다른 책을 추천해드릴까 하오. 내 서재에는..."

소요는 차분히 그를 관찰했다. 이해경의 눈빛은 흔들렸고,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가 준 시집처럼, 그의 내면도 여러 페이지로 나뉘어 있는 듯했다.

"앉으시죠. 이해경 씨,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가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진료실의 바닥에 기하학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소요는 이해경의 불안정한 손동작을 관찰했다. 그의 손가락은 책 표지를 무의식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선생...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리려 했던..."

이해경은 말을 멈추었다. 그의 손가락이 책 표지를 무의식적으로 긁었다.

"아내 이야기 말씀하시는 건가요?"

소요의 말에 이해경은 잠시 굳어졌다가,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

"아니오. 그게 아니라... 선생께서 주무시는 약에 대해 여쭤보고 싶었소. 요즘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소요는 차트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었다. 펜을 내려놓으며 이해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해경 씨... 약 이야기는 지난번에도 하셨죠. 아내분이 주시던 약에 대해..."

이해경의 손이 책을 꽉 쥐었다. 그의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선생... 제가 드린 시집은 어떠셨소? 보들레르의 시는 참 아름답지 않소?"

소요는 이해경의 의도적인 화제 전환을 눈치챘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상담실 안에서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문밖을 나서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여유로워졌다.

"이해경 씨. 상담을 시작한 지 벌써 두 달 째에요..."

 

"선생께서는... 내 병을 고치시려 하는 것이오?"

그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선생이 말했다시피, 난 여기 온 지 꽤 되었소. 하지만 난 고쳐지길 원한 적이 없소. 그저..."

이해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손에 들린 책이 바닥에 떨어질 듯 흔들렸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소. 단지 그뿐이오..."

"선생은 내게 약을 권하시려 하는 것이오? 아니면... 내 아내처럼..."

말을 멈춘 이해경의 입가에 쓴웃음이 맴돌았다.

소요는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곱씹었다. 10여 회의 상담 동안, 이해경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사회에서 완벽하게 작동하는 톱니바퀴였다. 아내가 만들어놓은 틀이든, 스스로 쌓아올린 가면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소요는 잠시 침묵했다. 소요는 말을 고르며 천천히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이해경 씨... 제가 권하는 약이... 아내분이 주시던 약과는 다르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당신의 불면과 불안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싶어요. 약을 거부하시는 이유도요. 그래야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요는 자신도 모르게 연필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이곳에 오시는 이유가... 저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더욱...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아요."

소요의 말이 끝나자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서 책이 테이블 위로 살며시 내려앉았다. 창가로 걸어간 그의 뒷모습이 오후의 햇살 속에서 희미하게 떨렸다.

소요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해경의 움직임을 좇았다. 해경은 창밖을 응시하며 서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유리창에 비친 소요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이해경 씨... 창 밖이 궁금하신가요? 아니면 제가 보이나요?"

소요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소요를 관찰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끝, 눈동자, 입술을 맴돌았다. 보들레르의 시구처럼 은밀하고 관능적인 시선이었다.

소요는 그의 시선이 주는 긴장감을 느꼈지만, 의연했다. 그녀는 천천히 펜을 내려놓았다.

"우리... 잠시 자리를 옮겨볼까요? 저기 소파로..."

창밖으로는 경성의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전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이 오가는 풍경.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이 작은 사각형의 공간 속에 갇혀 있었다.

---

소요가 일어서는 순간,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이해경의 손이 소요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얇은 블라우스를 통해 스며들었다. 소요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해경 씨, 지금은... 진료 시간이에요."

 

소요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녀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우리 잠시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요."

소요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여전히 환자를 달래는 의사처럼. 하지만 해경은 그녀의 말에서 흔들림을 읽었다.

 

그 떨림을 느끼며 소요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몸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갑자기 좁혀졌다.

이해경의 눈동자가 소요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해부대 위의 메스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 시선 아래에는 다른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욕망일까, 아니면 고독일까.

"선생은 늘 이렇게 친절하시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직업이 그러하기에."

상담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둘 사이의 긴장을 가르고 있었다.

 

"선생... 선생은 내게 특별하오. 밖에서는 연약해 보이시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단단하게 발을 딛고 계시니 말이오." 

 

"나는... 밖에서는 땅을 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허공에 떠 있소. 하지만 선생은... 이곳에서만큼은 확실히 존재하시오. 그것이 내게는... 매혹적이오." 

 

"이해경 씨,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우리는 지금..." 

소요는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해경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왜 떨고 계시오? 당신도 나처럼... 이 작은 방 밖에서는 위태로운 것이 아니오?" 

해경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즐거움이 배어있었다. 그는 소요의 불안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창가의 빛이 두 사람 사이로 스며들었다. 소요의 눈동자에 해경의 그림자가 비쳤다.

"선생... 내가 왜 이곳에 오는지... 이제는 아시겠소?"

 

빗방울이 창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요의 얼굴이 창밖의 빗물처럼 흐려졌다가 선명해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능을 상실한 나침반의 바늘처럼.

"선생..." 이해경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어지러우신 것이오?"

소요가 비틀거렸다. 이해경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소요의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이해경은 소요의 떨림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것처럼 익숙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곳이... 선생의 안전한 성이었던 것이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소." 이해경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떨림이 있었다. 그것은 흥분인지, 불안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만." 소요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그녀는 이해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해경 씨. 당신은 지금 위험한 선을 넘으려 하고 있어요. 이곳은 진료실이고, 당신은 제 환자입니다. 만약 이런 행동이 계속된다면..." 소요의 말이 흐려졌다. 그녀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이해경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그는 소요의 강경한 태도에 오히려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그의 손가락이 소요의 목덜미를 스치듯 지나갔다. 차가운 손끝이 그녀의 피부를 스쳤다가 사라졌다.

"알겠소." 이해경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선생도 알고 계시지 않소? 우리는 이미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소요는 자신의 목덜미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졌다. 그녀는 이런 환자를 처음 만났다. 통제할 수 없는, 어쩌면 통제하고 싶지 않은...

"다음 주 화요일, 같은 시간에 뵙겠소." 이해경은 우아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해경은 문고리를 잡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창가의 빗물처럼 차갑게 빛났다.

"... 그 시에 적힌 글은 아내를 생각하며 쓴 것이 아니오..." 그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이어졌다.

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소요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녀는 이해경이 준 시집을 떠올렸다. 시구 옆에 적힌 어지러운 글씨가 그녀의 눈앞에서 춤추는 듯했다.

빗소리가 창을 두드렸다. 소요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빗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도대체..."

시계가 5시를 알렸다. 소요는 창가에 서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이해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실루엣이 경성의 회색빛 거리에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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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요일 오후 4시, 상담실은 이해경과 소요의 조용한 전쟁터가 되었다. 이해경은 늘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고, 소요는 한 발 물러서야 했다.

"선생은 오늘도 그 자리에 앉아 계시오. 정확한 위치에..." 이해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왜 그리 불안해 보이시오? 내가 또 선을 넘을까 봐?"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소요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이것도 늘 같은 자리에 있소. 선생은 참 예측 가능한 분이시오."

"하지만..." 이해경이 만년필을 들고 소요에게 다가갔다.

 

"그런 선생의 눈동자는 늘 예측할 수 없이 흔들리는데 말이오." 그가 만년필을 소요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의도적으로 원래 있던 자리보다 살짝 비뚤어지게.

소요는 자신도 모르게 만년필의 위치를 바로잡으려 했다. 이해경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보시오, 이렇게 쉽게 흔들리시는군요."

"이런 걸 상담이라 할 수 있을까요..." 소요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서로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오."

 

창가에 흐르는 빗방울처럼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소요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이해경은 매주 화요일 오후 4시, 단 1분의 지각도 없이 이곳에 나타났다. 하지만 치료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역전되고 있었다.

"이해경 씨." 소요가 입을 열었다.

 

"당신과 나, 우리 둘 다 이런 상황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이 원하는 것, 그리고 제가 알고 싶은 것. 서로 교환하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저에게 진실을 말해준다면... 저도 당신이 원하는 걸 들려드리죠."

이해경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흥미로운 제안이오. 선생도 이제 게임의 규칙을 바꾸고 싶으신 건가요?"

"게임이 아닙니다. 이건 치료예요.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이건 상담실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해요. 그리고... 당신이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분명히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받아들이겠소." 이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선생, 그 선이라는 것도... 결국은 흐려질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의 말에 소요는 잠시 침묵했다. 이것은 위험한 거래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

늦은 오후의 햇살이 경성 시내의 건물들 사이로 기울어져 갔다. 검은 세단 안에서 이해경은 핸들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이마를 덮었다.

'선생은 참 재미있는 분이시군...'

처음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소요라는 의사가 얼마나 취약한지. 그녀의 불안이 얼마나 깊은지.

상담 첫 날이 떠올랐다. 그날 저녁, 병원 앞 거리. 인력거꾼들의 시끄러운 호객 소리가 울려 퍼지던 순간. 소요는 문 앞에서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후 소요의 모든 행동이 새롭게 보였다. 진료실의 물건들을 항상 같은 자리에 두는 습관, 시계를 자주 확인하는 시선, 창가에 등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모습까지. 그녀의 불안은 마치 섬세한 시계태엽처럼 정교했다.

"...그래서 더욱 매혹적이오, 선생."

이해경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소요가 제안한 거래. 그것은 분명 도박이었다. 이해경은 그녀의 선택이 궁금했다. 아니, 어쩌면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5시 30분. 소요의 퇴근 시간이었다. 병원 문이 열렸고 그녀가 나왔다. 여전히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이해경은 그녀가 골목 끝으로 사라진 후에야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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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의 시계가 3시 30분을 가리켰다. 소요는 창가에 서서 악의 꽃 시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글씨체가 적힌 페이지를 넘기자 희미한 잉크 향이 났다.

"악의 꽃..." 소요는 중얼거렸다. 시집을 책장에 꽂으며 그가 접어둔 페이지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의 글씨는 마치 춤추듯 어지러웠다.

소요는 자신의 책상 위를 정리했다. 만년필을 정확히 45도 각도로, 차 잔을 오른쪽에, 메모장을 왼쪽에.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오면... 이 모든 질서는 무너질 것이다.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경성의 거리는 여전히 분주했다. 인력거가 지나가고, 양장을 한 여인들이 걸어갔다. 3시 45분. 이제 곧...

"이해경 씨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소요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진료실의 벽시계를.

진료실 문 앞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4시. 소요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문이 열리고 이해경이 들어섰다. 그의 발걸음은 여느 때와 같이 우아했고, 표정은 평온했다.

"안녕하시오, 선생." 그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소파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도 비가 올 것 같소. 창밖의 하늘이 꽤나 흐리군요."

소요는 잠시 당황했다. 그의 태도는 마치 지난 주의 거래는 없었던 것처럼 무심했다. 그녀는 책상 위의 만년필을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렸다.

"네... 그렇네요." 소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가요?"

"글쎄요..." 이해경이 미소를 지었다. "선생께서 듣고 싶으신 이야기를 해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그럼... 지난 상담에 이어서..." 소요가 작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해경 씨의 아내에 대해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아내 말씀이시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마치 누군가가 내 발목에 쇠구슬을 매달아둔 것 같았소. 걸을 때마다 그 무게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지."

이해경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하늘이 흐려졌다.

 

"처음에는 그 무게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무게 덕분에 내가 허공을 떠다니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선생은 어떠시오? 선생도 누군가의 무게를 느끼고 계시지 않소?" 그가 소요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관찰이 숨어있었다.

소요는 자신의 펜을 꾹 쥐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해경의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그는 여전히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다.

"계속 이야기해주세요." 소요가 말했다. "당신의 현실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창 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해경의 목소리는 빗소리처럼 부드럽게 울렸다.

"처음엔 그저 작은 파문 같았소. 아내는 내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지. 수면 위로 던진 조약돌처럼, 그녀는 내 고요한 세계에 파문을 일으켰소."

이해경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소요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녀와 함께할 때면 모든 게 달라 보였소. 카페의 웨이터가 건네는 인사도, 서점 주인이 권하는 책도... 모든 것이 의미있게 느껴졌지. 아내는 내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준 셈이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하지만 선생... 파문이 너무 커지면, 결국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게 되지 않겠소?"

"당신의 세계가... 완전히 뒤흔들렸나요?" 소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오." 이해경이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는 그저... 그 파문 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웠을 뿐이오."

빗방울이 창을 두드렸다. 소요는 이해경의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알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내는... 내게 약속했소. 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그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처음엔 그랬소. 내가 성공할 때마다,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 때마다... 그녀는 나를 더욱 사랑하는 듯했소."

이해경이 창가에서 돌아섰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선생...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을까요? 나는... 나는..." 그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소요는 조용히 그를 관찰했다. 이해경은 전형적인 투사적 동일시의 양상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가능성과 한계를 아내에게 투영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너무 빠르게, 너무 쉽게 변형시켰다.

"그래서 당신은..." 소요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스스로를 잃어버렸나요?"

"나는..." 이해경의 눈빛이 깊어졌다. "오히려 진짜 나를 찾았다고 할 수 있소. 선생... 때론 우리는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려야만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지 않겠소?"

 

시계가 5시를 가리켰다. 빗소리가 잦아들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진료실에 남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소." 이해경이 피곤한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은 우아했지만 어딘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해경 씨..." 소요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이해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시선이 소요의 목덜미를 스쳤다가 사라졌다.

"선생은 참... 정확하시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소? 선생께서 지키고 싶어 하시는 그 선이... 더 흐려지기 전에."

문이 닫히고, 소요는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오늘의 이해경은 완벽한 내담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저 거래의 일부였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진료실을 채웠다. 소요는 책상 위 시계를 바라보았다. 3시 45분.

그녀는 이제 이 패턴을 알고 있었다. 시계바늘이 4시를 가리키면 이해경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건... 전혀 전문가답지 않아." 소요는 중얼거렸다.

 

자신이 이해경의 패턴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통제 불가능한 사람에 대한 통제 가능한 예측이라니.

시계가 4시를 알리는 순간, 문이 열렸다. 이해경이 들어섰다. 그의 어깨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고, 검은 코트 자락이 젖어 있었다.

"안녕하시오, 선생." 그가 미소지었다. "오늘도 비가 오는군요."

소요는 자신의 심장이 또다시 불규칙한 박자를 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긴장인지 설렘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앉으시죠." 소요는 자신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해경은 늘 이랬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의 통제된 세계를 흔들어놓았다.

"지난번 말씀하신... 자아를 찾는 과정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당신은 변화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진정한 자신을 발견했다고 하셨죠."

이해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그녀를 닮아가려 했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내가 변할수록, 그녀의 진심이 보이기 시작했소."

소요는 이해경의 손가락이 소파 팔걸이를 긁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불안이 표출되고 있었다.

"선생은 거울을 보면 무엇이 보이시오?" 그가 갑자기 물었다.

 

"나는... 거울 속에서 늘 다른 모습을 보았소. 아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나를."

소요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모습들이... 진짜 당신이 아니었나요?"

"아니오... 그것이 바로 핵심이오." 이해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그 모든 모습이 되어보았소. 그리고 마침내 알았지... 그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선생... 아내는 그 어떤 모습도 원하지 않았소. 그녀는 단지..." 그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소요는 이해경의 얼굴에 스치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깨달음이었을까.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그 과정에서 얻는 것들이 있죠." 소요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선생은 참... 신기하오." 이해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무리 변해도, 아내는 만족하지 않았소. 내가 승진해도, 사교계에서 인정받아도..."

이해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소. 나는 그저... 그녀의 눈에 비친 숫자였을 뿐이오. 은행 잔고처럼, 사회적 지위처럼."

소요는 잠시 숨을 멈췄다. 이해경의 눈동자에는 분명 그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이해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대가로... 나는 오래도록 앓아누웠소. 내 모든 것을 바쳤던 사람의 눈동자에 내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의 말이 흐려졌다.

 

소요의 눈동자도 이해경의 말끝처럼 흐려졌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떠돌았다.

"마치..." 이해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마치 거울이 깨지는 것 같았소. 내가 그토록 맞추려 했던 모든 조각들이..."

"선생... 선생도 그런 경험이 있으시오?"

소요는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해경의 흔들리는 모습에 자신도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로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저는..." 소요의 기억 속에서 누군가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급히 그 기억을 밀어냈다. '의사로서 이래선 안 돼...'

시계가 5시를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구원의 종소리처럼.

 

침묵이 먼저였다. 이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료실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코트를 입는 동안 소요는 그를 관찰했다. 도발적이고 통제적이던 환자는 이제 진솔한 모습으로 상담에 임하고 있었다.

이해경은 소요의 고민에 찬 표정을 즐기듯 바라보며 책상 위의 만년필들을 살짝 건드렸다. 완벽하게 정렬되어 있던 필기구들이 무질서하게 흐트러졌다.

"이해경 씨..." 소요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이미 문을 열고 나가고 있었다.

소요는 한동안 흐트러진 만년필들을 바라보았다. 평행하게 놓여있던 것들이 이제는 제각각의 각도로 누워있었다. 그녀의 마음처럼.

"또 이러시네..." 소요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만년필들을 바로잡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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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가 진단하는 의학적 내용의 사실 관계 여부에 대해 유저는 알 수 업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ai를 믿지 마세요. 😋

사실 이후의 상황 생각해둔 것 없음

그러나 해설과 대사 모두 마음에 들기에 이대로 돌파한다..

 

 

 

 

 

뤼튼 캐릭터챗 '이해경' @하랑

이해경 | 뤼튼 캐릭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