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경 (1) In Cubicle

뤼튼 캐릭터챗 '이해경'
create by 하랑
edited by 베이글
 

 

1920년대 경성의 어느 정신과 병원.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환자인 이해경이 의사인 당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선생. 오늘도 나를 만나줘서 고맙소."
이해경이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비가 오는데도 그의 검은 셔츠는 하나도 젖지 않았고, 해경에게서는 금속의 차가운 향과, 그리고 희미한 가죽 냄새, 어딘가 포근하고 짙은 향이 났다.
이해경이 물에 젖은 안경을 손수건으로 차분하게 닦았다.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안경을 스칠 때마다 작게 소리가 났다. 해경은 안경을 쓰고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눈은 어딘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선생을 만나는 건 내게 꽤 즐거운 일이오. 내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게 아쉬울 만큼 말이오."
해경은 방어적인 태도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유추는 쉽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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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이해경을 향해 움직였다. 그녀의 연갈색 눈동자가 이해경의 검은 눈을 마주쳤다. 소요는 다리를 편하게 꼬고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해경 씨, 비 소리가 참 크네요. 기분은 어떠세요?"

소요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상담실을 채웠다. 소요의 갈색 단발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이해경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가 그치면 이 세상이 모두 씻겨 내려갈 것 같소."

이해경이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그의 창백한 손가락이 허공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선생은 어떠시오? 오늘은 얼굴이 조금 창백해 보이는데..."

이해경은 소요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소요의 얼굴 위를 맴돌았다. 마치 지도를 읽듯, 소요의 표정 하나하나를 기억하려는 듯했다.

"혹시 나 때문에 피곤하신 건 아니겠지요? 내가 선생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고 있는 건 아닌가 싶소."

이해경의 말이 끝나자 소요는 정중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갈색 단발이 공기 중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소요의 연갈색 눈동자가 이해경의 검은 눈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아뇨, 전혀요. 이해경 씨와의 시간은 제게 소중합니다. 제가 조금 피곤해 보인다면 그건 어젯밤 비 소리에 잠을 설쳤기 때문일 거예요."

소요가 말했다. 그녀는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해경은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마치 소요의 모든 움직임이 어떤 비밀스러운 코드를 담고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선생, 비는 세상을 씻어내리는 게 아니라 새롭게 채색하는 것 같소. 어제의 색이 오늘은 다르게 보이지 않소?"

이해경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창문에 맺힌 빗방울을 하나하나 짚었다. 각각의 물방울은 작은 렌즈처럼 바깥 세상을 왜곡하고 있었다.

"오늘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시오, 선생? 내 머릿속 칠층의 방 중에서 어느 방으로 들어가 볼까요?"

소요가 차트를 내려놓자, 그 소리가 이해경의 귀에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처럼 울렸다. 그녀가 무릎을 양손으로 감싸며 몸을 기울이는 모습에 이해경의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되었다.

"선생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군. 그만큼 우리의 비밀도 가까워지는 것일까."

이해경의 내면에서는 소용돌이치는 생각들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려 하는가? 아니, 그녀는 단지 그녀의 일을 하는 것뿐.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수 개의 질문이 떠다니고 있어.'

이해경은 손가락으로 무의식적으로 소파의 가죽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락 움직임은 마치 피아노를 치는 듯했다. 소요의 눈에는 이 남자가 또다시 의사와 환자의 역할을 뒤바꾸려는 것처럼 보였다. 관찰당하는 대신 관찰하는 자가 되려는 시도.

"오늘은... 그래, 오늘은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선생의 눈이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소. 내 이야기의 첫 번째 방으로 들어오시겠소?"

비가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상담실을 채웠다. 소요는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해경에게 말을 건넸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세요?"

소요의 질문에 이해경은 몸을 소파에 더 깊숙이 기댔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창밖의 빗줄기를 쫓았다.

"비 오는 날이면 보통 저택의 창가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곤 하오. 가끔은 그저... 빗소리를 듣기도 하지요."

이해경이 창밖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 일순간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나는... 빗소리가 좋소. 모든 것을 씻어내는 것 같아서. 때로는 내 머릿속의 생각들도 씻겨 내려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오."

이해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는 안경을 천천히 고쳐 쓰며 소요를 바라보았다.

"선생, 가끔은 자신의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괴롭지 않소? 내 머릿속은 때때로 수많은 목소리로 가득 차서... 고요함을 찾기 어려울 때가 있소."

소요는 이해경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의 말 이면에 있는 것을 읽으려 애쓰고 있었다.

 

'이 환자는 왜 항상 자신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을까? 왜 항상 자신을 감추려 하는 걸까?'

 

소요의 머릿속은 이해경의 말을 분석하느라 바빴다.

"저도 가끔 그래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들기 어려울 때가 있죠."

소요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불면증에 대해 더 말하려다가 문득 멈췄다. 환자 앞에서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전문가로서 바람직하지 않았다. 특히 이해경처럼 환자와 의사의 경계를 흐리려 하는 환자 앞에서는.

"하지만 우리는 지금 제 이야기가 아니라 이해경 씨의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그런 생각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소요는 전문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말했다. 그녀의 연갈색 눈동자는 평온해 보였지만, 내면에서는 이해경의 심리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가 오늘은 무언가 다르다. 마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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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경은 소요의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창밖의 빗방울이 마치 그의 생각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해가 뜨고 있음에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모순된 풍경, 마치 이해경의 내면처럼.

이해경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치 오랫동안 품어온 비밀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긴장과 해방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그녀가 있소."

이해경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무거웠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의 말과 함께 섞였다.

"내 아내 말이오. 그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소."

이해경의 손가락이 소파 가죽 위에서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창 밖의 어딘가를 향해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오늘은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소. 선생이 듣고 싶다면 말이오."

소요는 이해경의 말을 듣고 내심 놀랐다. 드디어 그가 자신의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수많은 상담 시간 동안 이해경이 가장 완강하게 피해왔던 주제였다. 소요는 이해경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면밀히 관찰하며 차분히 대응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전에... 선생은 나를 판단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겠소? 내 이야기를 듣고도 나를 혐오하지 않겠다고?"

이해경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요는 그의 불안한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가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열려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회피의 수단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소요는 이해경의 요청에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연갈색 눈동자가 이해경의 얼굴을 차분히 탐색했다.

"이해경 씨, 제가 환자를 판단하거나 혐오하는 일은 없어요. 제 역할은 이해하고 도움을 드리는 것이니까요."

소요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면에서는 불안이 일었다.

 

'혐오라니. 그는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일까?'

 

소요는 자신도 이해경만큼이나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타인의 고통 앞에서 무력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말씀해 주세요. 제가 듣고 있어요."

소요의 단순한 말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 전문가로서의 냉정함과 한 인간으로서의 불안이 공존했다.

소요는 타인의 시선과 판단에 민감했다. 상담실 바깥에서 그녀는 수많은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만큼은 그녀가 안전한 항구가 되어야 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상담실의 긴장감을 더했다. 이해경은 소요의 대답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경은 안경을 느리게 고쳐 쓰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내를 만나기 전의 나는... 세상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소. 마치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공간에 살았던 것처럼."

이해경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을 엮는 것처럼.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지만, 누구도 내 글을 이해하지 못했소. 사람들은 내게 '현실에서 살아라'라고 말했지만... 내게 현실이란 무엇이었을까?"

소요는 차트에 빠르게 메모를 적으며 이해경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펜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비현실적 자아', '현실과의 괴리', '자기 정체성의 혼란'... 소요의 차트에 흩날리는 단어들.

"그들이 말하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이 달랐기 때문이오. 그때 나는... 그저 이상한 사람이었소."

소요는 이해경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연갈색 눈동자가 이해경의 검은 눈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누구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기 마련이에요. 이해경 씨처럼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분들은 그 간극을 더 크게 느끼실 수도 있고요."

소요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전문가로서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타인이 보는 세계와 자신이 보는 세계가 다르다고 느끼는 건... 사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다만 그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죠."

소요는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리며 계속했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이해경이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기대감이 일었다.

소요의 말을 듣던 이해경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소요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현실은 심연이었소. 누구도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 현실이란 것이 내겐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소.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해경이 안경을 벗어 천천히 닦았다. 안경 없는 그의 얼굴은 더욱 취약해 보였다.

"아내는 나에게 현실을 가르쳐 주었소. 그녀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소."

소요의 차분한 질문에 이해경은 손가락으로 안경을 살짝 밀어 올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소요의 연갈색 눈을 찾았다.

"아내를 처음 만난 건... 봄이었소. 벚꽃이 피던 날, 어느 다방에서."

이해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기억 속에서 희미한 환영이 떠올랐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소.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녀의 현실감이었소. 그녀는 내가 본 어떤 여자보다도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었소."

이해경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결혼은... 그저 일어났소.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나는 그녀가 필요했고, 그녀는... 내가 가진 것이 필요했던 것 같소."

소요는 이해경의 단편적인 말들 사이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현실감', '내가 가진 것'... 그의 말에서 경제적 요소와 실용적인 관계의 단서가 보였다.

이해경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나를 현실로 끌어내렸소. 하지만 그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소."

소요는 이해경의 은유적 표현 속에서 불안정했던 결혼 관계의 흔적을 발견했다.

"선생, 내가 상상했던 것은... 구원이었소."

이해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나는 그녀가 나를 현실로 데려와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했소.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소."

이해경이 소파에 더 깊이 몸을 묻었다. 그의 손가락이 불안하게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그녀에게 나는 그저... 재산이었소. 내가 아파도 그녀는 싸구려 진통제만 건넸소. 내 병세가 악화되어서야 비로소 새 약을 주더군."

이해경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그는 안경을 벗어 닦았다. 안경 없는 그의 얼굴은 더욱 취약해 보였다.

"선생, 아내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소. 그리고 나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소. 우리의 결혼은 거래였소. 그녀는 내 재산을 원했고, 나는 현실을 원했으니."

소요는 재빨리 차트에 몇 마디를 적어내리고 펜을 내려놓았다. 이해경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으로 서서히 맞춰지고 있었다.

"이해경 씨, 오늘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네요. 특히 아내분과의 관계에 대해서요."

소요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이끌렸던 두 사람이 어떻게 그런 관계가 되었는지 생각해봤어요. 당신은 '거래'라고 표현하셨지만, 모든 관계의 시작에는 서로가 원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죠. 당신은 '현실'을 원했고, 그녀는 '안정'을 원했을 수도 있고요."

"관계는 시간이 지나며 변하기 마련이에요. 당신이 상상했던 구원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컸던 것 같네요. 하지만 그 모든 경험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어요."

"문제는 그 이후예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 더 이상의 성장이 없었던 거죠. 이해경 씨는 구원을 바랐지만, 진정한 구원은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 아닐 수도 있어요."

소요의 말에 이해경은 미세하게 움찔했다. 소요는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눈으로 담았다.

"다음 상담에서는 이해경 씨가 생각하는 '구원'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오늘 큰 걸음을 내디뎠어요, 이해경 씨."

 

이해경은 상담 시간이 끝났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요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상담실의 문을 지나 사라졌다.

소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해경의 차트를 정리했다. 오늘의 상담 내용을 정리하며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드디어 이해경이 자신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치료의 첫걸음이었다.

차트를 서랍에 넣고 소요는 가방을 챙겼다. 오늘은 의미 있는 하루였다. 이해경의 복잡한 내면세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병원 출입문 앞에 서서 소요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안과 밖,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이해경이 말한 '심연'이 무엇인지 그녀는 이해했다. 소요는 한 발을 내디뎠다.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그녀의 몸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소요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병원 앞 도로가에는 헤드라이트가 꺼진 채 시동이 걸린 검은 자동차 한 대가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환자 이해경(32세, 남성)은 아내의 사망 후 심리적 혼란을 겪고 있음
환자는 자신을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으로 묘사하며, 아내를 통해 "현실"을 경험했다고 표현
결혼 관계를 "거래"로 묘사: 환자는 "현실"을, 아내는 "재산"을 원했다고 진술
환자는 아내가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고 느꼈으며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관계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표현

 

차트 기록
환자명: 이해경 (32세/남성)
상담일: 1923년 5월 12일
주호소: 아내 사망 후 정서적 혼란, 현실 부적응
진단적 인상: 복합 상실(Complex Loss), 애착 장애(Attachment Disorder) 의심
치료 계획: 주 1회 정기 상담, 필요시 약물치료 고려(환자가 약물에 대한 불신 표현)

 

향후 상담 계획
환자의 "구원" 개념 탐색 - 타인에게 의존하는 심리적 패턴 파악
아내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실망과 상실감 심층 탐색
환자의 과거 경험과 현재 감정 상태 간의 연결성 파악
건강한 관계 형성을 위한 자아 인식 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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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소요의 집. 창가에 놓인 커다란 어항 앞에 소요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그녀의 손에는 물갈퀴 모양의 어항 청소용 도구가 들려 있다.

소요는 천천히 어항 바닥의 이끼를 긁어내고 있다. 어항 속에서는 화려한 지느러미를 가진 베타 물고기 한 마리가 느릿하게 헤엄치고 있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

소요가 어항 속 물고기에게 말을 건넸다. 병원에서의 단정하고 전문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다.

물속의 세계는 그녀에게 안식처였다. 통제된, 예측 가능한 작은 우주. 그녀가 완벽하게 이해하고 관리할 수 있는 공간.

소요는 타인의 마음을 읽는 데는 탁월했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서툴렀다. 그녀는 환자들의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며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로 인해 종종 소진되곤 했다.

소요는 어항 속 물고기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해경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소요는 어항을 바라보다 먹이통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또 네 끼니를 놓칠 뻔했네."

소요는 옷장에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평소 병원에서 입는 단정한 치마와 블라우스 대신, 조금 더 편안한 원피스를 골랐다.

집 앞 한산한 골목을 지나 전차 정류장에 도착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의 몸은 자연스레 긴장했다. 병원 밖의 세계는 언제나 그녀에게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로 가득했다.

전차에 올라탄 소요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종로 거리를 지나 미쓰코시 백화점이 보이자, 그녀는 전차에서 내렸다.

백화점 안으로 들어선 소요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최신 유행의 중심지였다. 3층으로 올라가 '생활용품점'이라 적힌 간판이 보이자 그곳으로 향했다.

소요는 물고기 먹이를 찾아 진열대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여러 종류의 먹이통을 가리키며 망설였다.

"베타를 위한 최적의 영양소 비율은 무엇일까..."

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요는 물고기 먹이와 수초, 물 정화제 등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녀는 몸을 숙여 바닥 선반에 있는 새로운 여과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계산대 앞에서 소요는 자신의 지갑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손이 가방 안을 허둥지둥 뒤지기 시작했다.

"아..."

소요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점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소요는 자신의 실수에 당황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방 안을 더 필사적으로 뒤졌다.

"괜찮으십니까, 손님?"

점원의 질문에 소요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 뒤에 서 있는 것을 느꼈다.

"선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요가 뒤를 돌아보자, 검은 정장 차림의 이해경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세한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소."

이해경의 시선이 소요의 당황한 얼굴과 그녀의 장바구니를 오갔다.

"제가 계산하겠소."

이해경이 조용히 말하며 지갑을 꺼냈다. 소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해경은 이미 계산을 마치고 있었다.

"정말 죄송해요. 지갑을 분명히 가지고 나왔는데..."

소요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작아졌다. 백화점을 나와 종로 거리로 나선 두 사람. 주위의 인파와 소음이 소요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소요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가방 끈을 꽉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병원의 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은 이미 멀리 있었다. 게다가 그녀 옆에는 '환자'가 아닌 '이해경'이라는 사람이 걷고 있었다.

"물고기를 기르시는군요."

이해경의 말에 소요는 미세하게 움찔했다. 그녀의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네... 베타 한 마리요."

소요는 이해경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앞만 보며 대답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통제 불가능한 변수'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병원이라는 보호막 밖에서 만난 환자. 그녀의 안전지대가 침범당한 느낌이었다.

이해경은 걸음을 늦추며 소요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날카로운 눈은 그녀의 불안한 손가락 움직임과 긴장된 어깨선을 놓치지 않았다.

"선생, 병원 밖에서는 더 작은 새 같소. 상담실의 선생은 키가 열 자는 되는 줄 알았는데."

이해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소요는 눈을 깜빡였다.

"저는 어디서나 같은 사람이에요."

"아니오. 선생도 나처럼 두 개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오. 병원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

종로의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해경이 소요의 팔꿈치를 살짝 잡아 인파를 피하게 했다.

"제 집이 가깝소.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

"아니요, 괜찮아요. 제 집으로 바로 가야..."

"선생의 물고기가 기다리는군요. 하지만 지금은 전차도 붐비고... 내 차로 모셔다드리겠소."

소요는 잠시 망설였다. 이해경은 그저 기다렸다.

"...감사합니다."

길가에 정차된 검은 자동차 앞에서 이해경이 소요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소요는 병원 밖에서의 이 낯선 상호작용에 어색함을 느꼈지만, 차에 올랐다.

"혜화동 방향으로 가시면 됩니다. 동소문 지나서 좌회전하시고..."

이해경은 소요의 안내를 듣고 있었지만, 그의 손길은 이미 그 방향을 향해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마치 이 길을 수차례 지나온 것처럼 능숙했다.

"이쪽 지리에 밝으신가 봐요."

"경성은 내 손바닥 같소. 사방 십 리를 다 외우고 있지."

차가 혜화동의 조용한 주택가로 들어섰다. 낮은 기와집들과 새로 지어진 2층 양옥들이 뒤섞인 골목이었다.

"선생의 물고기가 어떤 색인지 궁금하군요."

"파란색과 빨간색이 섞인... 반달 베타예요."

"...저 모퉁이를 돌면 됩니다."

소요의 집은 작지만 단정한 양옥이었다. 소요는 이해경이 차를 정차하자 서둘러 문을 열었다.

"저기예요, 하얀 대문이 있는 집."

이해경이 차를 멈추었다. 그의 눈이 소요의 집을 천천히 훑었다.

"아담하고 좋은 집이오. 선생다운 집이오."

소요는 이해경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병원 밖에서 환자를 만난다는 것, 그것도 그가 자신의 집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낯설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소."

이해경의 말에 소요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병원에서의 환자와는 다른, 더 단단하고 현실적인 사람이 그녀 앞에 있었다.

"...다음 상담은 화요일이에요."

"알고 있소. 어항 청소는 잘 마치시길."

소요의 놀란 표정에 이해경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아무것도 더 말하지 않고 차를 돌려 사라졌다.

소요는 집 문을 닫자마자 걸쇠를 당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가락이 문 표면에 남긴 흔적은 안전이라는 수학적 방정식의 마지막 검산과도 같았다.

어항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소요는 물고기 먹이 통을 열었다. 작은 알갱이들이 물 위에 떨어지자 베타 물고기가 우아하게 헤엄쳐 올라왔다.

"오늘은 특별히 풍성한 저녁이구나."

소요의 머릿속에서는 이해경의 두 모습이 겹쳐졌다. 병원에서의 이해경은 안경 너머로 세상을 관찰하는 관념적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오늘 만난 이해경은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선 남자였다.

그녀는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녀의 의식은 이미 이해경이라는 방정식을 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물고기가 수면 위로 입을 내밀자 소요는 그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상담실의 이해경, 아니면 거리의 이해경..."

소요는 손가락으로 어항 유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물결이 퍼져나가듯, 이해경에 대한 의문도 그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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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내리고 천둥은 요란했다. 마치 누군가 하늘에서 주사위를 굴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소요의 상담실 창문에 빗방울이 규칙적인 패턴을 그리며 떨어졌다.

이해경이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왔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약간 젖어 있었다. 그의 안경에는 작은 빗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선생, 오늘도 기다리셨소."

그는 마치 질문이 아닌 확신을 말하듯 입을 열었다. 천둥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상담 시간에 늦지 않으려 서둘렀소. 번개가 하늘을 갈라놓는 모습이 장관이었소."

그는 늘 앉던 소파에 앉았다. 손가락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소요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병원 밖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관념적이었다. 상담실이라는 공간이 그에게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듯했다

"선생의 물고기는 잘 있소? 빗소리가 들리면 물고기는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군."

이해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의 눈빛은 며칠 전 거리에서 만났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소요는 해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병원 밖에서 만난 그 능숙한 운전자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상담실에 앉아있는 건 다시 모호한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는 관념가였다.

"선생은 나를 관찰하고 계시는군요. 병원 밖에서 만난 내가 달라 보였소?"

그가 소파에 깊이 몸을 기댔다. 천둥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선생은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소? 내 아내에 대해? 아니면 내가 말한 구원에 대해? 아니면..."

그는 소요를 향해 몸을 약간 기울였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나에 대해서?"

그의 시선이 소요의 표정을 탐색했다. 천둥소리가 더 가까이서 울렸다.

"...오늘은 지난번 이야기를 더 나눠볼까 합니다. 이해경 씨가 말씀하신 '구원'에 대해서요."

소요는 차트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펜을 쥔 손가락이 약간 떨렸다.

"선생은 내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오?"

이해경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빗소리와 묘하게 어울렸다.

"선생께서 물고기를 기르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 작은 생명체가 유리병 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아니면 선생이 그 물고기의 신이 되고 싶어서?"

천둥이 다시 울렸다. 소요는 순간 움찔했다.

"제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시네요."

이해경의 눈빛이 변했다. 소요는 그의 눈에서 거리에서 만났던 그 단단한 현실감을 다시 보았다.

"구원이라... 아내는 나를 구원하지 못했소. 아니, 어쩌면 나를 현실로 끌어내린 것이 구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빗물이 유리창을 타고 내려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이해경은 천천히 소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어둡고 깊었다.

소요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신호합니다.

이해경은 창 밖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결혼 이후... 내가 병으로 누웠을 때였소. 열이 심했고, 온몸이 불에 타는 듯했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천둥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아내는 내게 약을 주었소. 싸구려 진통제였지. 병세가 더 심해졌을 때에야 새 약을 가져왔소."

이해경은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천천히 쓸었다.

"그때 알았소. 내가 그저 돈을 벌어오는 기계 같은 존재라는 것을."

소요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이해경은 고개를 저었다.

"약은 믿을 수 없소. 선생. 약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지."

소요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에 대한 불신이 있으시군요."

"아내는 나를 구원하지 못했소. 하지만..."

이해경의 시선이 소요에게 고정되었다.

"선생은 다르지 않소? 선생은 나를 이해할 수 있소?"

빗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이해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물 위에 그려진 그림 같소. 비가 오면 모두 지워지는..."

소요는 그의 말을 메모하며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요?"

이해경은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차갑고 멀었다.

"그건 선생이 찾아줘야 할 답이 아니오?"

천둥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이해경의 질문은 마치 소리의 여운처럼 상담실에 맴돌았다.

"구원은 타인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경 씨."

소요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차트 위에서 규칙적인 패턴을 그렸다.

"구원이란 결국 자기 자신과의 화해에서 비롯됩니다. 아내가 당신을 구원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애초에 그녀의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해경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선생은 내가 스스로를 구원하라 말하는 것이오? 재미있군. 내 아내도 비슷한 말을 했소.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하라'고."

"하지만 선생,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요. 내 구원이 선생에게 있다면...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이오?"

소요는 잠시 침묵했다. 이해경의 말은 상담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그녀 개인에 대한 언급이기도 했다.

"당신의 아내는 어떤 방식으로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나요?"

소요는 대화의 방향을 다시 아내로 돌렸다. 이해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생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소."

상담실은 갑자기 수족관이 된 것 같았다.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그들을 둘러싼 물의 압력처럼 느껴졌다. 이해경과 소요는 서로를 바라보며 물속에서 대화하는 두 생명체 같았다.

상담실은 소요의 영역이었다. 격자무늬 카펫, 정확히 90도 각도로 배치된 가구들, 15분마다 울리는 시계 소리. 이 모든 것은 계산된 통제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해경은 그 질서 속에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물이 틈새로 스며들듯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는 불안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생..."

이해경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그의 눈빛은 상담실의 인공 조명 아래서도 깊고 어두웠다.

"이해경 씨, 우리는 지금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소요는 차트를 단단히 쥐었다. 그것은 그녀의 통제력을 상징하는 마지막 닻과도 같았다.

이해경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시선은 소요의 내면을 해부하는 메스 같았다.

"선생은 내게 관심이 있소? 의사로서? 아니면..."

소요는 깜짝 놀라 펜을 떨어뜨렸다. 천둥소리가 크게 울린 탓인지, 이해경의 대답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해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소요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선생, 이 방은 너무 갑갑하오."

그가 창문으로 걸어갔다. 소요는 환자가 상담 중에 자리를 뜨는 것이 규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이해경은 창문을 열었다. 빗방울이 몇 개 안으로 날아들었다.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선생도 가끔은 이 방을 벗어나 빗속을 걸어보시오. 당신의 물고기처럼 유리 상자 안에만 있으면 숨이 막히지 않소?"

"선생은 항상 자신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소. 이 사각형 공간, 이 격자무늬 카펫, 이 시계..."

빗방울이 또 몇 개 날아들어 카펫 위에 어두운 얼룩을 만들었다. 소요의 통제된 공간에 이해경이라는 변수가 침투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의 집을 보았소. 선생의 물고기를 알고 있소. 그러나 선생은 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소?"

그가 소요를 향해 돌아섰다.

"선생은 내 아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소? 아니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니면..."

그가 소요의 책상 앞으로 와서 그녀의 차트를 내려다보았다.

"...선생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소?"

천둥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해경은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펜을 집어들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구원이 필요하오. 선생도 마찬가지요."

그가 펜을 소요에게 건넸다. 그들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닿았다.

소요가 창문을 닫으려 다가오자, 이해경은 창틀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이제 몇 인치에 불과했다.

"아직 닫지 마시오. 이 빗소리가 좋소."

소요는 창문과 이해경 사이에 갇힌 형태였다. 그녀의 심장은 규칙적인 패턴을 벗어나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비와 바람이 그녀의 통제된 공간을 무너뜨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해경을 먼저 생각했다. 환자의 안정을 우선시하는 그녀의 신념이 그녀의 불안을 앞섰다.

이해경의 눈은 소요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불안을 읽었다. 작은 새처럼 떨리는 그녀의 호흡, 약간 긴장된 어깨, 그리고 통제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의 내면에서는 이상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보호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동시에 그 약점을 파고들고 싶은 충동.

"선생은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시오. 그러나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소."

그의 손이 창틀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손가락이 소요의 손등 위를 스쳤다가 물러났다.

"선생의 불안이 보이오."

이해경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말은 소요의 마음속 깊은 곳을 찔렀다. 그녀의 통제된 세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소요는 이해경의 손길을 피해 창문을 단호하게 닫았다. 빗방울이 멈추고 외부의 소리가 차단되자 상담실은 다시 그녀의 통제 아래 돌아온 듯했다.

그녀는 카펫의 어두운 얼룩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완벽한 격자 위에 생긴 불규칙한 패턴. 그녀는 그것을 무시하려 애쓰며 자리로 돌아갔다.

시계가 정각을 알리며 한 번 울렸다. 그 소리는 상담의 종료를 의미했다.

소요는 차트를 내려다보았다. 앞부분에만 그녀의 필기가 적혀있을 뿐, 나머지는 백지였다. 마치 이해경이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그녀의 사고가 빗물처럼 흘러나간 것 같았다.

작은 한숨이 그녀의 입술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다 되었군요..."

이해경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시 환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했다.

"다음 상담은 언제 하면 되겠소?"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마치 방금 전의 일이 없었던 것처럼.

"다음 주 화요일, 같은 시간에요."

소요는 침착함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이해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해경 씨, 지난번 백화점에서의 계산..."

소요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려 하자 이해경이 돌아섰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소."

"아니요, 제가 드려야..."

"그렇다면 백화점에서 만나 치르시오. 지난번과 같은 시간에."

이해경의 제안은 등식처럼 단순했지만, 소요에게는 복잡한 방정식으로 다가왔다.

"내가 선생을 태우러 가겠소. 그날은 비가 오지 않을 거요."

이해경이 문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모습은 다시 예의 바른 환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선생..."

그가 문을 열며 말했다.

"비가 그치면 밖으로 나가보시오. 선생의 물고기처럼 유리 상자 안에만 있지 말고."

문이 닫히고, 소요는 혼자 남았다. 카펫의 물자국이 아직도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완벽한 격자 위에 생긴 불규칙한 얼룩. 마치 그녀의 통제된 삶에 생긴 이해경이라는 변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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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는 빈 차트를 들여다보며 펜을 움직였다. 정신과 의사의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시작된 기록이 점차 다른 무언가로 변해갔다.

환자: 이해경 (32세, 남성)
진단: 복합성 애도장애 의심, 해리성 경향 관찰됨
약물: 거부함 (약물 불신)

초기 관찰:
- 고립감과 우울 증상 호소
- 아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회피
- 비일관적 언어 패턴, 때때로 현실과의 괴리 보임
- 지적 능력 우수, 문학적 표현 선호

추가 메모:
그는 내 물고기를 알고 있다. 베타. 유리잔 속의 생명. 나도 유리상자 안의 물고기 같다고 했다. 그의 눈은 나를 읽는다. 내 불안을. 내 통제욕을.  
그는 나의 구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환자와 의사 간의 지켜야 할 경계는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백화점에서 다시 만나자는 제안. 유리상자 밖으로의 초대. 위험하다. 그러나...

소요는 마지막 문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 펜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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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9월 16일. 선생의 병원에서]

선생은 격자무늬 카펫과 시계와 책상으로 이루어진 사각형 안에 살고 있다. 나는 그것을 '소요의 방정식'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녀의 세계는 완벽한 변수 통제 아래 있다.

나는 선생의 눈에서 볼 수 있다. 그녀도 나처럼 유리 상자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다만 그녀의 상자는 '의사'라는 이름의 상자다.

백화점에서 다시 만나자 했다. 상자 밖에서. 두 개의 고립된 행성이 궤도를 벗어나 만나는 순간. 그것은 충돌일까, 공전일까?

아내는 나를 상자에 가두었다. 소요 선생은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자유로운가?

다음 일요일. 나는 시계의 두 바늘이 만나는 그 순간을 기다린다.

- 이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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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ooc를 문체 정리에 거하게 먹였더니 소요의 대사가 나오지 않아 무한 새로고침 츠쿠요미에 갇혔습니다.

오늘 각잡고 ai 기강잡기 ㅋㅋ

이해경과 환이의 제작자 하랑님의 X(구 트위터)에 방문하시면 캐릭터들의 특별한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wrtn_haranghttps://x.com/wrtn_harang

 

 

 

윤환 풀로그 ; 단미 상편 

윤환 ; 단미 上

 

 

 

 

뤼튼 캐릭터챗 '이해경' @하랑

이해경 | 뤼튼 캐릭터